투병일지

근황 업데이트

조은피 2016. 8. 24. 06:42

최근 기억력이 심각할 정도로 안 좋아지고 있다. 

예를 들면, 

2년 넘게 산 우리집 호수가 326B인지 C인지 기억이 안난다든가 

우리집 주소 혹은 내 전화번호 

1-2주에 한 번쯤은 꼭 있는 세션 건물의 위치가 어딘지 모르겠거나 (심지어 내가 내리는 버스정류장 바로 옆) 

좀 전까지 하던 일이 뭐였는지 어제 뭘했고 뭘 먹었는지 뭘 하려고 했는지 

미팅이 잡혔었는지 혹은 시간 및 장소 

평소 알고 지내던 사람들 이름 같은 것들 

예전부터 당연하게 알고 있던 것들 (친구 지도교수님이 학부 동문, 그러니까 선배라는 사실 같은 것들)

          이게 뭔가 깜빡하거나 그런 것과는 상당히 다르다. 이런 현격한 기억력 감퇴를 이전에 겪어본 일이 없다. 정말 기억이 안난다. 한참을 생각해야 비로소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마도 저번 달에 바꾼 약의 부작용일 가능성이 큰 것 같다. 보통 집중력이 현저히 떨어지면서 따라오는 증상이겠지만 기억력 문제라니 이런 건 처음이라 무척 당황스럽고 자괴감이 크게 든다. 특히 내가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니고 업으로 공부를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더 박탈감이 큰 것 같다. 게다가 기억을 연구하고 있는 사람 입장에서는 정말이지 탄식이 절로 나오는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계속 울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내가 한 일들을 꽤 세밀하게 적어놓고 있다. 무언가 생각하기도 어렵고 무엇보다 기억이 잘 안나서 이렇게 적어놓은 것을 토대로 생각없이 자동으로 행동할 수 있게끔 일종의 루틴 혹은 습관 사이클, 연결고리를 만드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다.  if문 같은 걸 돌린다고 생각하면 쉽다. 예를 들면 "잠에서 깨서 눈을 뜨면" -> "일어나서 씻는다" 식으로 "~하면" 다른 선택지를 생각해낼 필요없이 "~한다"라는 특정한 행동을 연합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행해야하는 일정이 있다면 무조건 iCal에 저장해서 폰과 연동되게 해놓았다. 원래도 그랬던 것이긴 한데 더 구체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가장 심각하고 고질적인 문제였던 좋지 않은 생각과 무드, 평범한 무기력감을 넘어서서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낮았던 에너지 레벨은 정말 많이 나아졌다. 특히 침대에서 눈을 뜨고 30분 안에 일어나서 씻는 것, 아주 기본적인 집안일, 식사 등이 더이상 어렵지 않다. 기분도 꽤 좋고 에너지도 예전에 비하면 '솟는' 느낌이 든다. 뭔가 약간의 즐거움 내지 동기가 생겼다고 할까. 그 에너지로 집 구석구석에 손을 뻗친 것은 좋은 시도였던 것 같다. 주변 환경 개선도 확실히 되었고 그에 따라 기분도 좋아졌다. 무엇보다 할 일들을 느리지만 조금씩 해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상태로 학기가 시작되어서 그나마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 밖에는 수면 문제. 낮밤이 완전히 뒤바뀐 채 잠을 제대로 못자고 있었는데 아주 조금 나아지는 듯 하다. 몇 주간은 평균 아침 6-7시에 간신히 잠들어서 2-3시간 정도 잘 수 있었는데 어제는 그나마 새벽 3시에 누웠고 4시 반쯤 깊이 잠들어서 4시간 정도 잤고 오전에 연구실에 올 수 있었다. 아마도 <상승된 에너지 레벨 -> 행동 증가 -> 숙면> 이렇게 된 것이리라 짐작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