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 자신을 오직 하나의 인간 존재로만 본다. 말하자면, 사고하고 감정을 느끼는 존재로만 본다는 말이다. 나는 타인은 물론이고 나 자신에게서도 한 발 물러나 초연할 수 있는 어떤 이중성을 느낀다. 또한 내 경험이 얼마나 강렬하든, 그 경험에 참여하는 나와 그것을 비판하는 내가 있음을 잘 안다. 비판하는 나는 그저 관객의 입장으로 전혀 경험을 공유하지 않은 채, 단지 메모만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나는 '나'라기보다는 차라리 '너'에 가깝다. 비극이 될지도 모를 인생극이 끝나면, 관객은 제 갈 길로 가버린다. 관객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 인생극은 한 편의 허구이며 상상력으로 만들어 낸 작품일 뿐이다. 이러한 이중성이 우리를 종종 하찮은 이웃이나 친구로 만들어 버리는 것일 게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홀로 보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교제는 아무리 좋은 사람들과 어울린다고 해도 사람을 곧 지치고 산만하게 만들어 버린다. 나는 혼자 있는 게 좋다. 고독만큼 함께하기 좋은 벗을 아직은 만나 보지 못했다. 대체로 우리는 방 안에 홀로 머물 때보다 밖에 나가 사람들과 어울릴 때 더 외로움을 느낀다. 사색하거나 일하는 사람은 늘 혼자다. 그런 사람을 굳이 끌어내지 말자. 고독의 정도는 인간과 인간 사이를 메우고 있는 공간의 거리로는 측정할 수 없다. 케임브리지 대학이라는 그 북새통 속에서도 정말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은 사막에서 수도하는 이슬람의 탁발승만큼이나 고독하다. 

 

     농부는 종일 홀로 들판에서 김을 매거나 숲에서 나무를 베면서도 일에 몰두하는 덕에 전혀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밤에 집으로 돌아가면, 생각이 많아지는 탓에 기분 전환 삼아 '사람들을 만나러' 밖으로 나가야만 한다. 그것을 종일 혼자 있었던 것에 대한 보상이라 생각한다. 그리면서 농부는 어떻게 학생은 밤낮 가리지 않고 집 안에 홀로 앉아 있으면서도 권태를 느끼기는커녕 '우울증'에도 걸리지 않는지 궁금해한다. 그는 학생이 집 안에 있더라도 여전히 농부처럼 '그의' 밭에서 일을 하고, '그의' 나무를 베어 내며, 그런 다음에는 농부와 마찬가지로 휴식과 어울릴 사람들을 찾아 나서지만, 훨씬 압축된 형태로 추구할 뿐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인간의 교제는 일반적으로 너무 천박하다. 다들 너무 자주 만나는 탓에, 서로에게서 새로운 가치를 얻을 여유가 없다. 하루 세 끼 밥 먹을 때 만나서 우리 자신이라는 곰팡이 핀 오래된 치즈를 서로에게 권한다. 이렇게 자주 만나도 그럭저럭 참을 만해서 서로에게 전쟁을 선포하는 일이 없도록 하려면, 우리는 예의와 정중함이라 불리는 일련의 규칙을 세워 놓아야 한다. 우체국에서 만났다 싶으면, 친목회에서도 만나고, 또 밤마다 화롯가에서도 만나지 않는가. 그러다 보니 관계가 너무 돈독한 탓에 서로의 앞길을 막아서기도 하고, 서로의 발에 걸려 넘어지기도 한다. 장담컨대, 지금보다 조금 덜 만나도 중요하고 진심 어린 대화를 나누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을 터다. 공장에서 일하는 저 소녀들의 경우를 보자. 그들은 꿈속에서조차 결코 외로운 법이 없다. 내가 사는 곳처럼 1 제곱마일마다 한 사람이 살아간다면 좋지 않겠는가. 인간의 가치는 손으로 만져 볼 수 있는 피부에 있지 않다. 

 

     나는 숲에서 길을 잃어 굶주림과 탈진으로 나무 밑에서 죽어가던 어떤 남자의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다. 그는 몸도 쇠약해진 터에 병적인 상상력마저 기승을 부려 온갖 괴기스러운 환영에 둘러싸이게 됐고, 그것이 실재라고 믿기까지 했던 탓에 외로움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는 육체와 정신이 건강하고 힘이 넘치니, 지금과 비슷하지만 훨씬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교제를 통해서도 지속적으로 기운을 얻고, 우리가 결코 혼자가 아님을 알아 갈 수도 있을 터다. 

 

     내 집에는 참으로 많은 친구가 있다. 아무도 찾지 않는 아침나절이면 특히 더 붐빈다. 내 상황을 제대로 전하고자 몇 가지 비유를 들어보도록 하겠다. 호수에 살며 떠들썩하게 웃어 젖히는 물새나 월든 호수 자체가 외롭지 않듯이 나도 외롭지 않다. 저 외로운 호수에게 어떤 친구가 있겠는가? 그럼에도 호수는 그 담청색 물속에 푸른 악마가 아닌, 푸른 천사를 품고 있다. 태양은 혼자다. 안개가 자욱한 날이면 간혹 태양이 두 개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나는 하나가 가짜라는 사실을 안다. 하느님 역시 홀로다. 그러나 악마는 결코 혼자인 법이 없다. 늘 떼를 지어 돌아다닌다. 한마디로 악마는 군대다. 초원에 핀 멀런이나 민들레, 콩잎이나 괭이밥, 혹은 띠 호박벌이 외롭지 않듯, 나도 외롭지 않다. 밀브룩이나 풍향계, 북극성, 남풍, 4월의 소나기, 1월의 해동, 그리고 새로 지은 집에 자리 잡은 첫 번째 거미가 외롭지 않든, 나도 외롭지 않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고독' 중 

 

***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하는 이들이 하도 미니멀리스트의 선구자이자 갓퐈덜, 미국판 삼시 세 끼의 기록이라고 칭송하여 읽어본 월든. 그래서 난 또 뭔가 되게 포근하고 목가적이고 마음이 차분해지며 은은히 엄마미소가 절로 지어지는 그런 내용일 줄 알았더니 이거슨 거의 스뽜르똬 300급의 빡셈을 지닌 치열한 읽을거리였다. 간단히 말하자면 지금으로부터 먼 옛날 사회성도 성격도 그다지 좋지 않은 젊고 호기로운 꼰대 양키가 외딴 호숫가 숲의 땅을 무단 점거, 취식하며 살아본 썰을 풀어놓은 이야기였다. 나야말로 너무 어이없을 정도로 순진한 상상을 한 것이 아닌가 싶다. 어렸을 때부터 디즈니 만화영화를 많이 보며 자랐는데 그중에 백설공주를 혹시 기억하시는지? 난쟁이들의 집에 얹혀살게 된 백설이가 님들이 아오지 탄광에 일하러 나간 사이 집 청소나 해야겠다 하면서 고군분투하는데, 온 숲의 크고 작은 동물들이 지들 깜냥 되는 대로 열심히 도와주는 장면. 나도 모르게 그런 상상을 해보고 (디즈니의 세뇌가 이렇게 무섭습니다) 방심하고 책장을 넘겼다가 '헐! 대박' 한 것이다. 화자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 자신부터가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거 집에 별 일은 없고? 묻고 싶을 정도) 기본적으로 무척 염세적인 태도를 숨기지 않는데 나영석 힐링 예능인 줄 알고 들어왔다 신서유기에서 강호동한테 개 쳐 뚜드려 맞은 느낌이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적으로 더욱 신선하게 다가왔고 여러 꼭지들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어떤 의미에서든 치열하지 않은 삶이란 존재하는 것일까? 그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본다면 뭐라고 말할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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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in : 어구어구 at 2019. 9. 3.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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