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심 

내 목소리, 귀로는 듣지 못해도,

마음속으론 쟁쟁히 울릴 거예요.

이리저리 모습을 바꾸며

나는 무서운 힘을 발휘한답니다.

오솔길에서도 파도 위에서도

영원히 불안케 하는 길동무로서,

결코 찾지 않았는데도 늘 나타나고

저주도 받지만 아첨도 받는답니다.

그런데 당신은 근심이란 걸 모르시나요?

 

파우스트

나는 오로지 이 세상을 줄달음쳐 왔다.

쾌락이라면 모조리 그 머리채를 움켜잡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놓아 버렸으며,

내게서 빠져나가는 것은 내버려 두었다.

나는 오로지 갈망하고 오로지 성취해 왔다.

또한 소망을 품고 그토록 힘차게 

평생을 질주해 왔다. 처음엔 원대하고 힘에 넘쳤지만,

지금은 현명하고 신중하게 행동한다.

이 지상의 일은 충분히 알고 있지만,

천상을 향한 전망은 사라져 버렸다.

저 하늘을 향해 눈을 깜박거리는 자,

구름 위에 자신과 같은 존재가 있다고 꿈꾸는 자는 멍청이로다!

바로 여기에 굳건히 서서 주위를 둘러볼 일이다.

유능한 자에게 이 세상은 침묵하지 않는 법.

무엇 때문에 영원 속을 헤매 다닌단 말인가.

인식한 것은 모두 손에 넣을 수 있으니,

이렇게 지상의 나날을 보내도록 하라.

유령들이 날뛴다 해도 내 갈 길을 가는 거다.

어떤 순간에도 만족을 모르는 그자!

그가 당당히 나아가는 길엔 고통도 행복도 함께 있으리라!

 

근심

누구든 나한테 한번 붙잡히면

그자에겐 온 세상이 소용없게 되지요.

영원한 암흑이 내려와 

태양은 뜨지도 지지도 않아요.

바깥의 감각은 멀쩡해 보이더라도

안으로는 이미 어둠이 깃들어 있지요.

온갖 보화들 중 그 어느 것도 

제 것으로 소유할 수 없게 됩니다.

행복이든 불행이든 시름으로 변하여,

풍요 속에서 굶주릴 뿐이지요. 

즐거운 일이든 괴로운 일이든 

다음 날로 미루며

하염없이 앞날을 기다리기만 하니

결코 아무 일도 끝맺지 못해요.

 

파우스트

닥쳐라! 그런다고 해서 난 꿈쩍도 않는다!

그따위 허튼소리는 듣고 싶지도 않다.

썩 꺼져라! 그런 고약한 푸념을 계속 늘어놓으면,

제 아무리 영리한 자도 헷갈리겠다.

 

근심

가야 하나 와야 하나?

그런 자는 결단을 못내려요.

훤히 뚫린 길 한복판에서

더듬거리며 이리 반 발짝 저리 반 발짝.

점점 더 깊이 혼란에 빠져

모든 것을 비뚤게 보게 되지요.

자신에게나 남에게나 성가신 존재가 되어 

숨을 헐떡이다 숨이 막혔다 하니

질식까진 안 해도 생기가 없고,

절망하지도 몰두하지도 못하지.

줄곧 이리 뒹굴 저리 뒹굴,

내버려 두자니 괴롭고, 하자니 싫은 거지요.

때로는 해방이요, 때로는 억압이라

몽롱한 잠에 빠져 기운도 못 차리고 

꼼짝없이 제자리에 묶여

지옥에 갈 준비나 하지요.

 

파우스트

이 빌어먹을 유령들! 너희들은 그런 식으로 

천 번 만 번이고 인간을 괴롭히는구나.

무사태평한 날까지도 너희들은 

그물처럼 얽힌 고통의 불쾌한 혼란으로 바꿔 버린다.

악령에게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걸 나도 알아.

정령과 맺은 엄격한 유대도 풀 수 없느니라.

하지만 아아, 근심아, 슬며시 기어드는 너의 커다란 힘을,

나는 결코 인정하지 않겠다.

 

근심

내가 저주의 말을 남기고 재빨리

당신을 떠날 때, 비로소 나의 위력을 알 거예요!

인간이란 한평생 앞을 보지 못하니,

파우스트여, 당신도 이제는 장님이 되세요!

(파우스트에게 입김을 내뿜는다.)

 

파우스트 (눈이 먼다.)

밤이 점점 더 깊어 가는 것 같은데,

마음속에선 오히려 밝은 빛이 환하게 빛나는구나.

내가 생각했던 것을 서둘러 완성해야겠다. 

주인의 말씀, 그것만이 위력이 있는 것이니,

여봐라, 하인들아! 모두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거라!

내가 대담하게 계획했던 일을 멋지게 이루어다오.

연장을 잡아라, 삽과 괭이를 들어라!

정해진 목표는 당장에 해치워야 한다.

엄격하게 규칙을 지키고, 부지런히 일하면,

최고의 보수를 받을 것이다. 

이 위대한 사업을 완성하는 데는 

천 개의 손을 부리는 하나의 정신으로 족하리라. 

 

- 요한 볼프강 폴 괴테  "파우스트" 중.

 

****

뚜렷하게 정해진 목표를 갖고 존나게 노력해도 인간은 결국 근심에 둘러쌓일 수밖에 없는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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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in : 어구어구 at 2020. 5. 17.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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