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구어구 - 43

  1. 2021.01.14 세 가지 변화에 대하여 1
  2. 2020.11.06 알 수가 없는 것.
  3. 2020.10.17 창백한 푸른 점.
  4. 2020.05.17 근심과의 대화
  5. 2019.09.25 어린애 같은 나 자신.
  6. 2019.09.03 제발 혼자 좀 내버려두세여
  7. 2019.08.29 눈부시구먼
  8. 2019.08.24 아담과 이브
  9. 2019.08.16 마음새끼
  10. 2019.07.26 환상 속의 덜희

   나는 그대들에게 정신의 세 가지 변화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어떻게 하여 정신이 낙타가 되고, 낙타는 사자가 되며, 사자는 마침내 아이가 되는가를.

   내면에 외경심이 깃들여 있는 강력한 정신, 인내심 많은 정신은 무거운 짐을 잔뜩 지고 있다. 그 정신의 강인함은 무거운 짐을, 가장 무거운 짐을 요구하는 것이다. 

   무엇이 무겁단 말인가? 인내심 많은 정신은 이렇게 물으며 낙타처럼 무릎을 꿇고는 짐을 가득 싣고자 한다.

   그대 영웅들이여, 가장 무거운 짐은 무엇인가? 내가 짊어지고 나의 억센 힘에 기쁨을 느끼게 될 가장 무거운 짐은? 인내심 많은 정신은 이렇게 묻는다.

   자신의 오만에 고통을 주기 위해 자신을 낮추는 것, 자신의 지혜를 조롱하기 위해 자신의 어리석음을 드러나게 하는 것, 이것이 가장 무거운 짐인가?

   아니면 우리가 일이 승리를 구가할 때 그 일로부터 물러나는 것, 유혹하는 자를 유혹하기 위해 높은 산으로 올라가는 것, 이것이 가장 무거운 짐인가?

   혹은 깨달음의 도토리와 풀로 연명하면서 진리를 위해 영혼의 굶주림을 참고 견디는 것, 이것이 가장 무거운 짐인가?

   아니면 병석에 누웠으면서도 문병 오는 자들을 돌려보내 버리고, 그대가 들려주고자 하는 바를 결코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와 우정을 맺는 것, 이것이 가장 무거운 짐인가?

   혹은 진리의 연못이라면 더럽더라도 그 속으로 뛰어들어 차가운 개구리도 뜨거운 두꺼비도 물리치지 않는 것, 이것이 가장 무거운 짐인가? 

   혹은 우리를 경멸하는 자들을 사랑하고, 유령이 우리를 위협하더라도 그 유령에게 손을 내미는 것, 이것이 가장 무거운 짐인가?

   인내심 많은 정신은 이 모든 무겁기 그지없는 짐을 짊어지고 그의 사막을 달려간다. 가득 짐을 실은 채 사막을 달리는 낙타처럼. 

   하지만 고독하기 그지없는 사막에서 두 번째 변화가 일어난다. 여기에서 정신은 사자가 된다. 정신은 자유를 쟁취하려 하고 사막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 

   정신은 여기에서 그의 마지막 주인을 찾는다. 정신은 마지막 주인, 최후의 신에게 대적하려 하며, 승리를 위해 정신은 이 거대한 용과 일전을 벌이려 한다. 

   정신이 더 이상 주인으로 신으로 여기지 않으려는 거대한 용은 무엇인가? 너는 해야 한다. 이것이 그 거대한 용의 이름이다. 그러나 사자의 정신은 이에 대항하여 "나는 원한다."라고 말한다.

   너는 해야 한다는 황금빛으로 번쩍이며 정신의 가는 길을 가로막는다. 그것은 비늘 짐승으로서 그 비늘마다 '너는 해야 한다!'라는 명령이 금빛으로 빛나고 있다. 

   천 년 묵은 가치가 이 비늘들에서 빛난다. 그리하여 모든 용들 가운데서 가장 힘센 용이 말한다. "사물들의 모든 가치, 그것은 나에게서 빛난다."라고.

   "모든 가치는 이미 창조되었다. 모든 창조된 가치, 그것이 바로 나다. 진실로 말하노니 나는 원한다라는 요구는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된다!" 용은 이렇게 말한다. 

   형제들이여, 정신에 있어서 사자는 무엇 때문에 필요한가? 왜 무거운 짐을 견디는 짐승으로 만족하지 못하는가? 체념과 외경심의 짐승으로 말이다.

   새로운 가치의 창조. 이것은 사자도 아직 이루지 못하는 일이다. 그러나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자유의 획득. 이것은 사자의 힘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자유를 쟁취하고 의무 앞에서도 신성하게 아니요, 라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형제들이여, 사자가 되어야 한다.

   새로운 가치를 위한 권리를 쟁취하는 것, 이것은 인내심 많고 외경심을 가진 정신에게 주어질 수 있는 가장 놀라운 소득이다. 참으로 그 정신에게 있어 그것은 강탈이며 강탈하는 짐승에게 주어진 일이다.

   정신도 한때 너는 해야 한다를 가장 신성한 것으로서 사랑했다. 하지만 이제 정신은 가장 신성한 것에서도 미혹과 자의를 찾아내야 한다. 그의 사랑으로부터 자유를 강탈해 내려면 말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강탈을 위해 사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말하라, 형제들이여, 사자도 하지 못한 일을 어떻게 아이가 할 수 있단 말인가? 강탈하는 사자가 이제는 왜 아이가 되어야만 하는가?

   아이는 순진무구함이며 망각이고, 새로운 출발, 놀이, 스스로 도는 수레바퀴, 최초의 움직임이며, 성스러운 긍정이 아닌가.

   그렇다. 창조라는 유희를 위해서는, 형제들이여, 성스러운 긍정이 필요하다. 이제 정신은 자신의 의지를 원하고 세계를 상실한 자는 이제 자신의 세계를 되찾는다. 

   나는 그대들에게 세 단계 변화에 대해 말했다. 어떻게 하여 정신이 낙타가 되었고, 낙타는 사자가 되었으며, 사자는 아이가 되었는가를.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나는 이제 짐을 이고 지고 사막을 걷는 낙타됨을 거부하고 갓 태어난 사자이다. 레오 레오 레오 밀림의 왕자 레오. 아기 사자 눈망울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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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in : 어구어구 at 2021. 1. 14.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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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저에게는 '인간이 목숨을 부지한다. ' 라는 말의 의미가 지금껏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는 얘기가 될 것 같습니다. 제가 가진 행복이라는 개념과 이 세상 사람들의 행복이라는 개념이 전혀 다를지도 모른다는 불안. 저는 그 불안 때문에 밤이면 밤마다 전전하고 신음하고, 거의 발광할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저는 과연 행복한 걸까요? 저는 어릴 때부터 정말이지 자주 참 행운아다, 라는 말을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저 자신은 언제나 지옥 가운데서 사는 느낌이었고, 오히려 저더러 행복하다고 하는 사람들 쪽이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훨씬 더 안락해 보였습니다.

 

나한테는 재난 덩어리가 열 개 있는데, 그중 한 개라도 이웃 사람이 짊어지게 되면 그것만으로도 그 사람에게는 충분히 치명타가 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한 일도 있습니다.

 

즉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웃 사람들의 괴로움의 성질과 정도라는 것이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실용적인 괴로움, 그저 밥만 먹을 수 있으면 그것으로 해결되는 괴로움. 그러나 그 괴로움이야말로 제일 지독한 고통이며, 제가 지니고 있는 열 개의 재난 따위는 상대도 안 될 만큼 처참한 아비지옥일지도 모릅니다. 그건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치고는 자살도 하지 않고 미치지도 않고 정치를 논하며 절망도 하지 않고 좌절하지도 않고 살기 위한 투쟁을 잘도 계속하고 있다. 괴롭지 않은 게 아닐까? 철저한 이기주의자가 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확신하고 한번도 자기 자신에게 회의를 느낀 적이 없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편하겠지. 하긴 인간이란 전부 다 그런 거고 또 그러면 만점인 게 아닐까. 모르겠다...... 밤에는 푹 자고 아침에는 상쾌할까? 어떤 꿈을 꿀까? 길을 걸으면서 무얼 생각할까? 돈? 설마 그것만은 아니겠지. 인간은 먹기 위해 산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지만 돈 때문에 산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어. 아닐 거야. 그러나 어쩌면...... 아니, 그것도 알 수 없지......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익살이었습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사람이라는 것이 알 수가 없어졌고, 저 혼자 별난 놈인 것 같은 불안과 공포가 엄습할 뿐이었습니다. 저는 이웃 사람하고 거의 대화를 못 나눕니다. 무엇을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몰랐던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저의 최후의 구애였습니다. 저는 인간을 극도로 두려워하면서도 아무래도 인간을 단념할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익살이라는 가는 실로 간신히 인간과 연결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겉으로는 늘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필사적인, 그야말로 천 번에 한 번밖에 안 되는 기회를 잡아야 하는 위기일발의 진땀 나는 서비스였습니다.

 


또 저는 가족한테 꾸중을 듣고 말대꾸한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그 사소한 꾸중은 저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아 저를 미칠 지경에 이르게 했기 때문에 말대꾸는커녕 그 꾸중이야말로 말하자면 마세일계, 즉 고대로부터 단일 계통을 이어온 일본인의 '진리'임에 틀림없다, 나한테는 그 진리를 행할 능력이 없으니까 더 이상 인간과 더불어 살 수 없는게 아닐까, 라고 확신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말싸움도 자기변명도 하지 못했습니다. 남이 저에게 욕을 하면 그래 정말이야, 내가 엄청 잘못 생각하고 있었어, 그렇게 생각되어서 언제나 그 공격을 잠자코 받아들이고 속으로는 미칠 듯한 공포를 느꼈던 것입니다. 

 

그야 누구든 남이 비난을 퍼붓거나 화를 낼 때 기분이 좋을 사람은 없겠습니다만, 저는 화를 내는 인간의 얼굴에서 사자보다도, 악어보다도, 용보다도 더 끔찍한 동물의 본성을 보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평상시에는 본성을 숨기고 있다가 어떤 순간에, 예컨대 소가 풀밭에서 느긋하게 잠자고 있다가 갑자기 꼬리로 배에 앉은 쇠등에를 탁 쳐서 죽이듯이, 갑자기 무시무시한 정체를 노여움이라는 형태로 드러내는 모습을 보면 저는 언제나 머리털이 곤두서는 듯한 공포를 느꼈습니다. 이 본성 또한 인간이 되는 데 필요한 자격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저 자신에 대한 절망감에 휩싸이곤 했습니다.

 

늘 인간에 대한 공포에 떨고 전율하고 또 인간으로서의 제 언동에 전혀 자신을 갖지 못하고 자신의 고뇌는 가슴속 깊은 곳에 있는 작은 상자에 담아두고 그 우울함과 긴장감을 숨기고 또 숨긴 채 그저 천진난만한 낙천가인 척 가장하면서, 저는 익살스럽고 약간은 별난 아이로 점차 완성되어 갔습니다.

 

뭐든 상관없으니까 웃게만 만들면 된다. 그러면 인간들은 그들이 말하는 소위 '삶' 이라는 것 밖에 내가 있어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을지도 몰라. 어쨌든 인간들의 눈에 거슬려서는 안 돼. 나는 무야. 바람이야. 텅 비었어. 그런 생각만이 강해져서 저는 익살로 가족을 웃겼고, 또 가족보다 더 불가사의하고 무시무시한 머슴이랑 하녀들한테까지도 필사적으로 익살 서비스를 했던 것입니다. 

 


뭐가 갖고 싶지? 하고 누가 물으면 저는 그 순간 갖고 싶은 게 아무것도 없어져버리곤 했습니다. 아무래도 상관없어. 어차피 나를 즐겁게 해줄 것 따위는 없어. 그런 생각이 꿈틀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남이 준 것은 아무리 제 취향에 맞지 않아도 거절도 못했습니다. 싫은 것을 싫다고 하지도 못하고, 또 좋아하는 것도 쭈뼛쭈뼛 훔치듯이 전혀 즐기지 못하고, 그러고는 표현할 길 없는 공포에 몸부림쳤습니다. 즉 저에게는 양자택일하는 능력조차도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뒷날 저의 소위 '부끄럼 많은 생애'의 큰 원인이 되기도 한 성격의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존경받는다는 개념 또한 저를 몹시 두렵게 했습니다. 거의 완벽하게 사람들을 속이다가 전지전능한 어떤 사람한테 간파당하여 산산조각이 나고 죽기보다 더한 창피를 당하게 되는 것이 '존경받는다'는 상태에 대한 제 정의였습니다. 인간을 속여서 '존경받는다'해도 누군가 한 사람은 알고 있다. 그리고 인간들도 그 사람한테서 듣고 차차 속은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을 때, 그때 인간들의 노여움이며 복수는 정말이지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상상만 해도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이었습니다.

 


틀림없이 편파적일 게 뻔해. 필경 인간에게 호소하는 것은 헛일이다. 나는 역시 아무것도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참고, 그리고 익살꾼 노릇을 계속해 갈 수밖에 없다는 마음이 되었습니다.

 

뭐야, 인간에 대한 불신을 말하고 있는 거야? 흥, 네가 언제부터 기독교인이 됐는데? 하고 조소할 사람도 혹시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불신이 반드시 곧장 종교의 길로 통하는 것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실 그 조소하는 사람을 포함해서 인간은, 여호와건 뭐건 생각조차 안 하고 태연하게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서로 속이면서, 게다가 이상하게도 전혀 상처를 입지도 않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 정말이지 산뜻하고 깨끗하고 밝고 명랑한 불신이 인간의 삶에는 충만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그렇지만 저는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 따위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저도 익살로 아침부터 밤까지 인간들을 속이고 있으니까요. 저느 바른생활 교과서에 나오는 정의니 뭐니 하는 도덕 따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저한테는 서로 속이면서 살아가는, 혹은 살아갈 자신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이야말로 난해한 것입니다. 인간은 끝내 저한테 그 요령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그것만 터득했더라면 제가 인간을 이렇게 두려워하면서 필사적인 서비스 같은 것은 안 해도 됐을 텐데 말입니다. 인간의 삶과 대립되어 밤이면 밤마다 지옥 같은 괴로움을 맛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말입니다. 

 

- 다자이 오사무, '인간 실격'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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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in : 어구어구 at 2020. 11. 6. 0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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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이 빛나는 점을 보라.

그것은 바로 여기, 우리 집, 우리 자신인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 아는 사람, 소문으로 들었던 사람, 그 모든 사람은 그 위에 있거나 또는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기쁨과 슬픔, 숭상되는 수천의 종교, 이데올로기, 경제이론, 사냥꾼과 약탈자, 영웅과 겁쟁이, 문명의 창조자와 파괴자, 왕과 농민, 서로 사랑하는 남녀, 어머니와 아버지, 앞날이 촉망되는 아이들, 발명가와 개척자, 윤리 도덕의 교사들, 부패한 정치가들, 수퍼스타, 초인적 지도자, 성자와 죄인 등 인류의 역사에서 그 모든 것의 총합이 여기에, 이 햇빛 속에 떠도는 먼지와 같은 작은 천체에 살았던 것이다. 

     지구는 광대한 우주의 무대 속에서 하나의 극히 작은 무대에 지나지 않는다. 이 조그만 점의 한 구석의 일시적 지배자가 되려고 장군이나 황제들이 흐르게 해던 유혈의 강을 생각해 보라. 또 이 점의 어느 한 구석의 주민들이 거의 구별할 수 없는 다른 한 구석의 주민들에게 자행했던 무수한 잔인한 행위들, 그들은 얼마나 빈번하게 오해를 했고, 서로 죽이려고 얼마나 날뛰고, 얼마나 지독하게 서로 미워했던가 생각해 보라. 

     우리의 거만함, 스스로의 중요성에 대한 과신, 우리가 우주에서 어떤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망상은 이 엷은 빛나는 점의 모습에서 도전을 받게 되었다. 우리 행성은 우주의 어둠에 크게 둘러싸인 외로운 티끌 하나에 불과하다. 이 광막한 우주공간 속에서 우리의 미천함으로부터 우리를 구출하는 데 외부에서 도움의 손길이 뻗어올 징조는 하나도 없다. 

     지구는 현재까지 생물을 품은 유일한 천체로 알려져 있다. 우리 인류가 이주할 곳 - 적어도 가까운 장래에 - 이라고는 달리 없다. 방문은 가능하지만 정착은 아직 불가능하다. 좋건 나쁘건 현재로서는 지구만이 우리 삶의 터전인 것이다. 

     천문학은 겸손과 인격수양의 학문이라고 말해져 왔다. 인간이 가진 자부심의 어리석음을 알려주는 데 우리의 조그만 천체를 멀리서 찍은 이 사진 이상 가는 것은 없다. 사진은 우리가 서로 더 친절하게 대하고 우리가 아는 유일한 고향인 이 창백한 푸른 점을 보존하고 소중히 가꿀 우리의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 칼 세이건, "창백한 푸른 점"에서.

 

++++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외계 생명체'라는 것이 공상 과학에서나 나오는 허무맹랑한 소재라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가 태양계의, 더 나아가 우주의 중심이며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무대라고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의 과학으로 밝혀진 바에 의하면 지구는 태양계 내에서도 창백한 푸른 점에 불과하며, 지구가 속해 있는 태양계 또한 존나게 큰, 아니 지금 이 순간조차 무한히 팽창하고 있는 우주의 변두리에 짜져 있을 뿐이다. 이렇게 헤아리기 어려울만큼 광대한 우주를 무대로 지구 외의 다른 행성에서 우리와 같은, 하지만 조금은 결이 다른 '살아있는 것'이 존재할 가능성을 확률적으로 생각해보면 지구가 생명체를 품은 우주 유일의 행성이며 그곳에서 사는 우리 인간이 우주 유일의 생명체일 것이라는 가설이야말로 허무맹랑한 이야기다. 하지만 우리에게 허용된 우주를 항해하는 기술이 (돈이) 충분하지 못해 현재로서는 이 지구에 사는 우리 외의 생명체는 발견하지 못했다. 우리는 그렇게 희소하고 소중한 존재다.

     요즘 사람들은 그저 모든 것에 화가 머리 끝까지 나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이들은 자기 자신 안에 갇혀서 늘 분주하지만 한치 앞도 성장하지 못한 채, 타인을 비난하고 어떻게든 끌어내리며 스스로의 초조함을 달래는 것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는 것 같다. 먼지같이 작은 창백한 푸른 점에서 먼지같이 왔다갈 찰나의 인생을 왜 그렇게 머리 박터지게 아웅다웅 살아갈 수 밖에 없는지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드넓은 우주에서도 이 태양계, 그 속에서도 이 창백한 푸른 점에서 우연히도 엇비슷한 시공간에 태어나 같이 숨쉬며 살아간다는 것. 이건 감사할 일을 넘어 경이로운 일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조금만 더 친절해진다면 좋을텐데. 이럴 때 미약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나 스스로가 타인에게 조금 더 친절해지자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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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in : 어구어구 at 2020. 10. 17. 0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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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심 

내 목소리, 귀로는 듣지 못해도,

마음속으론 쟁쟁히 울릴 거예요.

이리저리 모습을 바꾸며

나는 무서운 힘을 발휘한답니다.

오솔길에서도 파도 위에서도

영원히 불안케 하는 길동무로서,

결코 찾지 않았는데도 늘 나타나고

저주도 받지만 아첨도 받는답니다.

그런데 당신은 근심이란 걸 모르시나요?

 

파우스트

나는 오로지 이 세상을 줄달음쳐 왔다.

쾌락이라면 모조리 그 머리채를 움켜잡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놓아 버렸으며,

내게서 빠져나가는 것은 내버려 두었다.

나는 오로지 갈망하고 오로지 성취해 왔다.

또한 소망을 품고 그토록 힘차게 

평생을 질주해 왔다. 처음엔 원대하고 힘에 넘쳤지만,

지금은 현명하고 신중하게 행동한다.

이 지상의 일은 충분히 알고 있지만,

천상을 향한 전망은 사라져 버렸다.

저 하늘을 향해 눈을 깜박거리는 자,

구름 위에 자신과 같은 존재가 있다고 꿈꾸는 자는 멍청이로다!

바로 여기에 굳건히 서서 주위를 둘러볼 일이다.

유능한 자에게 이 세상은 침묵하지 않는 법.

무엇 때문에 영원 속을 헤매 다닌단 말인가.

인식한 것은 모두 손에 넣을 수 있으니,

이렇게 지상의 나날을 보내도록 하라.

유령들이 날뛴다 해도 내 갈 길을 가는 거다.

어떤 순간에도 만족을 모르는 그자!

그가 당당히 나아가는 길엔 고통도 행복도 함께 있으리라!

 

근심

누구든 나한테 한번 붙잡히면

그자에겐 온 세상이 소용없게 되지요.

영원한 암흑이 내려와 

태양은 뜨지도 지지도 않아요.

바깥의 감각은 멀쩡해 보이더라도

안으로는 이미 어둠이 깃들어 있지요.

온갖 보화들 중 그 어느 것도 

제 것으로 소유할 수 없게 됩니다.

행복이든 불행이든 시름으로 변하여,

풍요 속에서 굶주릴 뿐이지요. 

즐거운 일이든 괴로운 일이든 

다음 날로 미루며

하염없이 앞날을 기다리기만 하니

결코 아무 일도 끝맺지 못해요.

 

파우스트

닥쳐라! 그런다고 해서 난 꿈쩍도 않는다!

그따위 허튼소리는 듣고 싶지도 않다.

썩 꺼져라! 그런 고약한 푸념을 계속 늘어놓으면,

제 아무리 영리한 자도 헷갈리겠다.

 

근심

가야 하나 와야 하나?

그런 자는 결단을 못내려요.

훤히 뚫린 길 한복판에서

더듬거리며 이리 반 발짝 저리 반 발짝.

점점 더 깊이 혼란에 빠져

모든 것을 비뚤게 보게 되지요.

자신에게나 남에게나 성가신 존재가 되어 

숨을 헐떡이다 숨이 막혔다 하니

질식까진 안 해도 생기가 없고,

절망하지도 몰두하지도 못하지.

줄곧 이리 뒹굴 저리 뒹굴,

내버려 두자니 괴롭고, 하자니 싫은 거지요.

때로는 해방이요, 때로는 억압이라

몽롱한 잠에 빠져 기운도 못 차리고 

꼼짝없이 제자리에 묶여

지옥에 갈 준비나 하지요.

 

파우스트

이 빌어먹을 유령들! 너희들은 그런 식으로 

천 번 만 번이고 인간을 괴롭히는구나.

무사태평한 날까지도 너희들은 

그물처럼 얽힌 고통의 불쾌한 혼란으로 바꿔 버린다.

악령에게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걸 나도 알아.

정령과 맺은 엄격한 유대도 풀 수 없느니라.

하지만 아아, 근심아, 슬며시 기어드는 너의 커다란 힘을,

나는 결코 인정하지 않겠다.

 

근심

내가 저주의 말을 남기고 재빨리

당신을 떠날 때, 비로소 나의 위력을 알 거예요!

인간이란 한평생 앞을 보지 못하니,

파우스트여, 당신도 이제는 장님이 되세요!

(파우스트에게 입김을 내뿜는다.)

 

파우스트 (눈이 먼다.)

밤이 점점 더 깊어 가는 것 같은데,

마음속에선 오히려 밝은 빛이 환하게 빛나는구나.

내가 생각했던 것을 서둘러 완성해야겠다. 

주인의 말씀, 그것만이 위력이 있는 것이니,

여봐라, 하인들아! 모두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거라!

내가 대담하게 계획했던 일을 멋지게 이루어다오.

연장을 잡아라, 삽과 괭이를 들어라!

정해진 목표는 당장에 해치워야 한다.

엄격하게 규칙을 지키고, 부지런히 일하면,

최고의 보수를 받을 것이다. 

이 위대한 사업을 완성하는 데는 

천 개의 손을 부리는 하나의 정신으로 족하리라. 

 

- 요한 볼프강 폴 괴테  "파우스트" 중.

 

****

뚜렷하게 정해진 목표를 갖고 존나게 노력해도 인간은 결국 근심에 둘러쌓일 수밖에 없는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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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in : 어구어구 at 2020. 5. 17.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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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 자신의 내면에 있는 새가 죽은 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자기가 그 새의 죽음을 느끼지 않았단 말인가? 그렇다, 그 새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있는 어떤 다른 것이 죽은 것이다. 죽은 것은 자기가 옛날 언젠가 작열하던 태양 아래에서 참회의 생활을 하던 시절 사멸시켜 버리고자 하였던 바로 그것이 아닐까? 죽은 것은 바로 자신의 자아가 아닐까? 자기가 그 숱한 세월 동안 투쟁을 벌여왔던 대상, 언제나 거듭하여 자기를 이겼던 것, 매번 사멸하고 나서도 매번 또다시 살아나, 기쁨을 금지하고, 두려움을 느끼는 그것, 바로 자신의 그 작고 불안한, 자만에 찬 자아가 죽은 것이 아닐까? 이곳 숲속에 자리잡고 있는 사랑스런 강가에서 오늘 마침내 죽음을 맞이하였던 것이 바로 그것이 아닐까? 자기가 지금 마치 어린아이처럼, 이토록 확신에 넘쳐서, 이토록 두려움 없이, 이토록 기쁨에 가득 차 있는 것은 바로 그 자아의 죽음 때문이 아닐까?

 

     이제 싯다르타는, 자기가 바라문으로서, 참회자로서 이 자아와 투쟁을 하였지만 무엇 때문에 그 싸움이 헛수고가 되고 말았던가 하는 이유도 어렴풋이나마 예감할 수 있었다. 너무 많은 지식이, 너무 많은 성스러운 구절이, 너무 많은 제사의 규칙들이, 너무 많은 단식이, 너무 많은 행위와 노력이 자기를 방해하였던 것이다. 자기는 자만심으로 가득차 있었으니, 언제나 가장 현명한 자였고, 언제나 최고의 열성파였으며, 언제나 학자이자 사상가였으며, 언제나 사제 아니면 현인이었다. 이런 사제 기질 속으로, 이런 교만한 마음속으로, 이런 정신적 성향 속으로 자기의 자아가 살며시 파고 들어와서는 거기에서 단단히 자리를 잡고 앉아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는 동안, 자기는 단식과 참회로써 그 자아를 죽이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자기는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또한 어떤 스승도 어차피 자기를 구제해 줄 수는 없을 것이라고 하였던 그 내밀한 음성이 옳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때문에 자기는 세상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으며, 쾌락에 권력에, 여자와 돈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으며, 장사꾼, 주사위 노름꾼, 술꾼, 탐욕스런 자가 될 수밖에 없었으며, 그러다가 결국 자기의 내면에 있던 사제 의식과 사문 의식이 죽어 없어지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그 때문에 자기는 계속하여 그 가증스런 세월을 견뎌나갈 수밖에 없었으며, 그 구토증을, 그 공허감을, 황량하고 길을 잃고 타락한 인생의 그 무의미함을 견뎌낼 수밖에 없었으며, 그러다가 마침내는 그러한 삶의 종말에 이르게 되었으며, 쓰디쓴 절망감에 빠지게 되었으며, 탕아 싯다르타, 탐욕자 싯다르타도 죽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 싯다르타는 죽고 없었으며, 새로운 싯다르타가 잠에서 깨어나 있었다. 이 새로운 싯다르타 역시 아마도 늙게 될 터이고, 이 새로운 싯다르타 역시 아마도 언젠가는 필연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을 터이니, 싯다르타란 덧없는 존재이며, 형상을 지닌 것은 모조리 덧없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자기는, 이 새로운 싯다르타는 젊고 기쁨에 가득 찬 어린아이이다. 

 

     그는 이러한 생각들을 하고 있었으며, 미소를 지으면서 자기 위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으며, 벌이 윙윙거리는 소리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귀기울여 들었다. 명랑한 기분으로 그는 흘러가는 강물 속을 들여다보았는데, 강물이 그토록 자기 마음에 든 적이 일찍이 한 번도 없었으며, 흘러가는 강물 소리와 강물이 들려주는 비유가 자기의 귀에 그토록 강렬하고 아름답게 들렸던 적은 일찍이 한 번도 없었다. 마치 강물이 자기에게 들려줄 어떤 특별한 이야기가 있기라도 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자기가 아직 알지 못하는 그 특별한 이야기가 자기를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 강물 속에 싯다르타는 빠져 죽으려고 하였었다. 피곤에 지치고 절망에 빠진 그 옛 싯다르타는 이 강물 속에 오늘 빠져 죽었다. 그러나 새로운 싯다르타는 이 흘러가는 강물에 깊은 사랑을 느꼈으며, 그 강을 다시 곧바로 떠나지는 않겠다고 결심하였다. 

..

강물은 어디에서나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강의 원천에서나, 강 어귀에서나, 폭포에서나, 나루터에서나, 시냇물의 여울에서나, 바다에서나, 산에서나, 도처에서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강에는 현재만이 있을 뿐, 과거라는 그림자도, 미래라는 그림자도 없다. 

..

"그러자 나의 인생도 한 줄기 강물이었습니다. 소년 싯다르타는 장년 싯다르타와 노년 싯다르타로부터 단지 그림자에 의하여 분리되어 있을 뿐, 진짜 현실에 의하여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싯다르타의 전생들도 결코 과거의 일이 아니었으며, 싯다르타의 죽음이나 범천에로의 회귀도 결코 미래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무것도 없었으며,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은 현존하는 것이며, 모든 것은 본질과 현재를 지니고 있습니다. "

..

싯다르타는 무아지경에 빠져 황홀한 상태로 말하였으니, 이러한 깨달음이 그를 그토록 기쁘게 하였던 것이다. 아, 일체의 번뇌의 근원이 시간 아니고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자신을 괴롭히는 것도, 두려워하는 것도 그 근원은 모두 시간 아니고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그렇다면 인간이 그 시간이라는 것을 극복하는 즉시, 인간이 그 시간이라는 것을 없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즉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힘겨운 일과 모든 적대감이 제거되고 극복되는 것이 아닌가? 

..

"이 세계는 불완전한 것도 아니며, 완성을 향하여 서서히 나아가는 도중에 있는 것도 아니네. 이 세계는 매순간순간 완성된 상태에 있으며, 온갖 죄업은 이미 그 자체 내에 자비를 지니고 있으며, 작은 어린애들은 모두 자기 내면에 이미 백발의 노인을 지니고 있으며, 젖먹이도 모두 자기 내면에 죽음을 지니고 있으며, 죽어가는 사람도 모두 자기 내면에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아무도 다른 사람에 대하여 그 사람이 스스로의 인생 행로에서 얼마만큼 나아간 경지에 있는가를 감히 이러쿵저러쿵 말할 수는 없네. 도둑과 주사위 노름꾼의 내면에 부처가 깃들여 있고, 바라문의 내면에 도둑이 도사리고 있으니 말이야. 깊은 명상에 잠긴 상태에서는 시간을 지양할 수가 있으며, 과거에 존재하였던, 현재 존재하고 있는, 그리고 미래에 존재할 모든 생명을 동시적인 것으로 볼 수가 있어. 그러면 모든 것이 선하고, 모든 것이 완전하고, 모든 것이 바라문이야. 따라서 나에게는 존재하고 있는 것은 선하게 보이며, 나에게는 죽음이나 삶이 다 같게 보이며, 죄악이나 신성함이 똑같이, 지혜로움이나 어리석음이 똑같이 보여. 세상만사의 이치가 틀림없이 그러하며, 세상만사는 오로지 나의 동의, 오로지 나의 흔쾌한 응낙, 그리고 나의 선선한 양해만을 필요로 할 뿐이네. 이것은 나에게는 좋은 일이지. 나를 후원해 줄 뿐,  나에게 결코 해를 입힐 수는 없으니 말이야. 나는 나 자신의 육신의 경험과 나 자신의 영혼의 경험을 통하여 이 세상을 혐오하는 일을 그만두는 법을 배우기 위하여, 이 세상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하여, 이 세상을 이제 더 이상 내가 소망하는 그 어떤 세상, 내가 상상하고 있는 그 어떤 세상, 내가 머릿속으로 생각해 낸 일종의 완벽한 상태와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놔둔 채 그 세상 자체를 사랑하기 위하여 그리고 기꺼이 그 세상의 일원이 되기 위하여, 내가 죄악을 매우 필요로 하였다는 것을, 내가 관능적 쾌락, 재물에 대한 욕심, 허영심을 필요로 하였다는 것을 그리고 가장 수치스러운 절망 상태도 필요로 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네. "

 

-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중.

 

*****

     헤세의 싯다르타를 다시 읽었다 (네 바로 그 허세떨기 딱 좋은 허르만 허세). 최근 끊이지 않는 깊은 번뇌에 (더욱) 휩싸여 어쩐지 불교 경전이나 성경책 비슷한 것을 읽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전에 읽을 때보다 훨씬 피부에 와닿은 부분들이 있어 여기에 발췌해 적어본다. 가만히 미친놈처럼 정신수양을 잘 하는가 싶더니 급브레이크 밟고 속세의 환락과 더러움 속에 푹 찌들어 살다가 간신히 정신차리고 빠져나온 싯다르타가, 자기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역겨웠던 나머지 현타 빡세게 와서 그만 강물에 투신 자살하려다가 헐? 내 인생은 강물?! 하고 급깨달음을 얻는 부분이다.

     개인적으로 내가 하는 일과 나 자신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많이 드는 요즘이다. 내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인생을 어찌저찌 살아보니 일이라는 것은 내가 열심히 하든 말든 최선을 존나게 다 하든 말든 상관없이 잘 안 풀릴 때도 있는 것 같다. 그 때마다 그걸 내 자아에 깊게 투영해서 괴로워해봤자 나아질 것이 없다는 것이다. 좋든 싫든 의도했든 안했든 어차피 일어난 일들에, 또 앞으로 일어날지 모르는 일들에, 그저 번뇌에 일일이 휩쓸려봤자 보탬될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잊지 말자고 자주 되뇌인다. 그럼에도 나로서는 자아와 시간의 속박으로부터 빠져나온다는 것이 참으로 쉽지 않다. 차라리 맹목적인 명상이나 극단적인 단식을 수행하는 것이 쉬울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듯 나는 범인이기에 자아로부터의 구제, 열반의 경지에 닿는 것은 꿈도 꾸지 않고 더 나아가 세상의 이치따위 깨닫지 못해도 좋다. 그저 오늘 하루 감사하는 마음으로 충실히 살아갈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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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in : 어구어구 at 2019. 9. 25.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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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나 자신을 오직 하나의 인간 존재로만 본다. 말하자면, 사고하고 감정을 느끼는 존재로만 본다는 말이다. 나는 타인은 물론이고 나 자신에게서도 한 발 물러나 초연할 수 있는 어떤 이중성을 느낀다. 또한 내 경험이 얼마나 강렬하든, 그 경험에 참여하는 나와 그것을 비판하는 내가 있음을 잘 안다. 비판하는 나는 그저 관객의 입장으로 전혀 경험을 공유하지 않은 채, 단지 메모만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나는 '나'라기보다는 차라리 '너'에 가깝다. 비극이 될지도 모를 인생극이 끝나면, 관객은 제 갈 길로 가버린다. 관객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 인생극은 한 편의 허구이며 상상력으로 만들어 낸 작품일 뿐이다. 이러한 이중성이 우리를 종종 하찮은 이웃이나 친구로 만들어 버리는 것일 게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홀로 보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교제는 아무리 좋은 사람들과 어울린다고 해도 사람을 곧 지치고 산만하게 만들어 버린다. 나는 혼자 있는 게 좋다. 고독만큼 함께하기 좋은 벗을 아직은 만나 보지 못했다. 대체로 우리는 방 안에 홀로 머물 때보다 밖에 나가 사람들과 어울릴 때 더 외로움을 느낀다. 사색하거나 일하는 사람은 늘 혼자다. 그런 사람을 굳이 끌어내지 말자. 고독의 정도는 인간과 인간 사이를 메우고 있는 공간의 거리로는 측정할 수 없다. 케임브리지 대학이라는 그 북새통 속에서도 정말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은 사막에서 수도하는 이슬람의 탁발승만큼이나 고독하다. 

 

     농부는 종일 홀로 들판에서 김을 매거나 숲에서 나무를 베면서도 일에 몰두하는 덕에 전혀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밤에 집으로 돌아가면, 생각이 많아지는 탓에 기분 전환 삼아 '사람들을 만나러' 밖으로 나가야만 한다. 그것을 종일 혼자 있었던 것에 대한 보상이라 생각한다. 그리면서 농부는 어떻게 학생은 밤낮 가리지 않고 집 안에 홀로 앉아 있으면서도 권태를 느끼기는커녕 '우울증'에도 걸리지 않는지 궁금해한다. 그는 학생이 집 안에 있더라도 여전히 농부처럼 '그의' 밭에서 일을 하고, '그의' 나무를 베어 내며, 그런 다음에는 농부와 마찬가지로 휴식과 어울릴 사람들을 찾아 나서지만, 훨씬 압축된 형태로 추구할 뿐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인간의 교제는 일반적으로 너무 천박하다. 다들 너무 자주 만나는 탓에, 서로에게서 새로운 가치를 얻을 여유가 없다. 하루 세 끼 밥 먹을 때 만나서 우리 자신이라는 곰팡이 핀 오래된 치즈를 서로에게 권한다. 이렇게 자주 만나도 그럭저럭 참을 만해서 서로에게 전쟁을 선포하는 일이 없도록 하려면, 우리는 예의와 정중함이라 불리는 일련의 규칙을 세워 놓아야 한다. 우체국에서 만났다 싶으면, 친목회에서도 만나고, 또 밤마다 화롯가에서도 만나지 않는가. 그러다 보니 관계가 너무 돈독한 탓에 서로의 앞길을 막아서기도 하고, 서로의 발에 걸려 넘어지기도 한다. 장담컨대, 지금보다 조금 덜 만나도 중요하고 진심 어린 대화를 나누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을 터다. 공장에서 일하는 저 소녀들의 경우를 보자. 그들은 꿈속에서조차 결코 외로운 법이 없다. 내가 사는 곳처럼 1 제곱마일마다 한 사람이 살아간다면 좋지 않겠는가. 인간의 가치는 손으로 만져 볼 수 있는 피부에 있지 않다. 

 

     나는 숲에서 길을 잃어 굶주림과 탈진으로 나무 밑에서 죽어가던 어떤 남자의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다. 그는 몸도 쇠약해진 터에 병적인 상상력마저 기승을 부려 온갖 괴기스러운 환영에 둘러싸이게 됐고, 그것이 실재라고 믿기까지 했던 탓에 외로움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는 육체와 정신이 건강하고 힘이 넘치니, 지금과 비슷하지만 훨씬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교제를 통해서도 지속적으로 기운을 얻고, 우리가 결코 혼자가 아님을 알아 갈 수도 있을 터다. 

 

     내 집에는 참으로 많은 친구가 있다. 아무도 찾지 않는 아침나절이면 특히 더 붐빈다. 내 상황을 제대로 전하고자 몇 가지 비유를 들어보도록 하겠다. 호수에 살며 떠들썩하게 웃어 젖히는 물새나 월든 호수 자체가 외롭지 않듯이 나도 외롭지 않다. 저 외로운 호수에게 어떤 친구가 있겠는가? 그럼에도 호수는 그 담청색 물속에 푸른 악마가 아닌, 푸른 천사를 품고 있다. 태양은 혼자다. 안개가 자욱한 날이면 간혹 태양이 두 개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나는 하나가 가짜라는 사실을 안다. 하느님 역시 홀로다. 그러나 악마는 결코 혼자인 법이 없다. 늘 떼를 지어 돌아다닌다. 한마디로 악마는 군대다. 초원에 핀 멀런이나 민들레, 콩잎이나 괭이밥, 혹은 띠 호박벌이 외롭지 않듯, 나도 외롭지 않다. 밀브룩이나 풍향계, 북극성, 남풍, 4월의 소나기, 1월의 해동, 그리고 새로 지은 집에 자리 잡은 첫 번째 거미가 외롭지 않든, 나도 외롭지 않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고독' 중 

 

***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하는 이들이 하도 미니멀리스트의 선구자이자 갓퐈덜, 미국판 삼시 세 끼의 기록이라고 칭송하여 읽어본 월든. 그래서 난 또 뭔가 되게 포근하고 목가적이고 마음이 차분해지며 은은히 엄마미소가 절로 지어지는 그런 내용일 줄 알았더니 이거슨 거의 스뽜르똬 300급의 빡셈을 지닌 치열한 읽을거리였다. 간단히 말하자면 지금으로부터 먼 옛날 사회성도 성격도 그다지 좋지 않은 젊고 호기로운 꼰대 양키가 외딴 호숫가 숲의 땅을 무단 점거, 취식하며 살아본 썰을 풀어놓은 이야기였다. 나야말로 너무 어이없을 정도로 순진한 상상을 한 것이 아닌가 싶다. 어렸을 때부터 디즈니 만화영화를 많이 보며 자랐는데 그중에 백설공주를 혹시 기억하시는지? 난쟁이들의 집에 얹혀살게 된 백설이가 님들이 아오지 탄광에 일하러 나간 사이 집 청소나 해야겠다 하면서 고군분투하는데, 온 숲의 크고 작은 동물들이 지들 깜냥 되는 대로 열심히 도와주는 장면. 나도 모르게 그런 상상을 해보고 (디즈니의 세뇌가 이렇게 무섭습니다) 방심하고 책장을 넘겼다가 '헐! 대박' 한 것이다. 화자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 자신부터가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거 집에 별 일은 없고? 묻고 싶을 정도) 기본적으로 무척 염세적인 태도를 숨기지 않는데 나영석 힐링 예능인 줄 알고 들어왔다 신서유기에서 강호동한테 개 쳐 뚜드려 맞은 느낌이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적으로 더욱 신선하게 다가왔고 여러 꼭지들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어떤 의미에서든 치열하지 않은 삶이란 존재하는 것일까? 그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본다면 뭐라고 말할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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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in : 어구어구 at 2019. 9. 3.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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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반짝 빛나는 지갑을 꺼내서 반

짝반짝 빛나는 물고기를 샀다 반짝

반짝 빛나는 여자도 샀다 반짝반

짝 빛나는 물고기를 사서 반짝반짝

빛나는 냄비에 넣었다 반짝반짝 빛

나는 여자가 손에 든 반짝반짝 빛나

는 냄비 속의 물고기 반짝반짝 빛나는

거스름 동전 반짝반짝 빛나는 여

자와 둘이서 반짝반짝 빛나는 물고

기를 가지고 반짝반짝 빛나는 동전

을 가지고 반짝반짝 빛나는 밤길을

돌아간다 별이 반짝반짝 빛나는 밤하늘

이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물을 흘리

며 반짝반짝 빛나는 여자는 울었다

 

-이리사와 야스오, 반짝반짝 빛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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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in : 어구어구 at 2019. 8. 29. 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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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은 자신들이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여전히 타인으로 남아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아직 서로 사랑하는 것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었다(이는 아담이 이브를 보호하려 하기보다는 그녀를 꾸짖음으로써 자신을 지키려고 한 사실에 의해서도 아주 뚜렷하게 드러난다). 인간이 사랑에 의해서 다시 결합되지 못한 채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은 수치심의 원인인 동시에 죄책감과 불안의 근원이다. 

     따라서 인간의 가장 절실한 욕구는 자신의 분리를 극복하려는, 고독이라는 감옥에서 빠져 나오려는 욕구이다. 이러한 목적을 성취하는 데 '결정적으로' 실패한다면 곧 미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 하면 완전한 고립에 대한 공포감은 분리감이 사라져 버리도록 외부 세계로부터 철저하게 물러남으로써 극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이 분리되어 있는 그 외부 세계마저도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시대와 문화를 초월해서 모든 인간은 한 가지의 동일한 문제의 해결에 직면해 왔다. 그것은 어떻게 하면 분리감을 극복하고 일치를 이루는가, 어떻게 자신의 개인적인 삶을 초월해서 합일을 찾아낼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

 

     그 문제는 인간이 처해 있는 상황, 즉 인간 존재의 조건이라는 동일한 근거에서 나오기 때문에 동일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해답은 다양하다. 그 문제는 동물 숭배에 의해, 인간의 희생이나 군사적 정복에 의해, 사치에의 탐닉에 의해, 금욕적인 포기에 의해, 강제 노동에 의해, 예술적 창조에 의해, 신에 대한 사랑에 의해, 그리고 인간에 대한 사랑에 의해 해답을 낼 수 있다.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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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in : 어구어구 at 2019. 8. 24. 0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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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은 제가 이대로 계속 가는 걸 원치 않아요."

   

      "바로 그걸세. 그건 그대의 마음이 살아 있다는 증거일세. 그대가 마침내 얻어낸 모든 것들을 한낱 꿈과 맞바꾸는 데 두려움을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이지."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제가 제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거죠?"

 

     "그대가 그대의 마음을 고요히 할 수 없기 때문이네. 아무리 그대가 듣지 않는 척해도, 마음은 그대의 가슴속에 자리할 것이고 운명과 세상에 대해 쉴새없이 되풀이해서 들려줄 것이네." 

   

     "제 마음이 이토록 저를 거역하는데도요?"

 

     "거역이란 그대가 예기치 못한 충격이겠지. 만일 그대가 그대의 마음을 제대로 알고 있다면, 그대의 마음도 그대를 그렇게 놀라게 하지는 않을 걸세. 왜냐하면 그대는 그대의 꿈과 소원을 잘 알고, 그것들을 어떻게 이끌어가야 하는지도 알 것이기 때문이네. 아무도 자기 마음으로부터 멀리 달아날 수는 없어. 그러니 마음의 소리를 귀담아듣는 편이 낫네. 그것은 그대의 마음이 그대가 예기치 못한 순간에 그대를 덮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야."

 

-파울로 코엘료, 연금술사 중 

 

*****

스테디셀러는 괜히 읽어보기 싫은 비뚤어진 마음 때문에 여지껏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가 바람같이 슝 놀러온 오빠네 책장에 우연히 있길래 가벼운 마음으로 꺼내 읽은 연금술사. 박근혜 씨 때문인지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돕는다는 둥 하는 말이 괜히 불편했다. 돕긴 뭘 도와 다들 혐생 시궁창이라고 난린데 ㅠㅠ 아마도 내가 종교에 뿌리 깊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 모든 것은 신 혹은 신에 준하는 존재의 숨결에 의해 만들어졌고 모든 것은 사실 이미 정해져있다는 것, 인간은 그것이 무엇인지 잘 느껴보고 따랐을 때 비로소 자아의 신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 등등 책의 큰 뼈대를 이루는 기본개념들이 마음에 와닿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런 걸 안 믿어! 못 믿어! 이런 걸 떠나서 그저 잘 '모르겠는' 느낌에 가깝다. 그런데 이 책에 등장하는 양치기라든가 연금술사라든가 하는 주요 인물들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스무스하게 구렁이 담넘어가듯 '알았다! 나 깨달음ㅋ' '나는 만물을 관통하는 하나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어' '바람이될거얌ㅋ 나 바람시켜죠^^' 이러니까 나로서는 약간 머리주변에 물음표가 올라오고 어리둥절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만 인간, 나의 마음에 대해 생각해볼 거리를 줬다는 점에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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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해봐요" 라고 말했다. 

     "무엇을 어떻게 시작하고 저희가 어디에 있는지조차도 잘 모르겠습니다. 비르히니아가 '네가 약속한 거 기억하지?' 라고 물었을 때 그녀에게 한 번 더 '다음 주에 우리 같이 점심 먹을 거잖아, 오늘은 내 부모님이 나를 기다리고 계셔' 라는 말을 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저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고뇌에서부터 빠져나오기 위하여 아무 말이나 토해내기를 원하는 사람처럼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합니다. 아마도 연상 작용 때문인지 모르지만 지난 겨울 프랑스 요리사가 성 이시드로에 있는지 아니면 성 페르난도에 있는지 아리송한데, 한 오래된 별장에 개업한 삐에르라는 식당에 대해서 말을 합니다. 정말 삐에르가 그 남쪽 지역에 있던가? 여하튼 이런 식으로 순간 말을 더듬어대다가 확실한 이름과 주소는 얼버무려버립니다. 이런 신통치 못한 저의 기억들로 인해 제가 중요한 인물로 보이기 위해서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식당을 칭찬하는 거라고 그녀가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에 저는 제가 그런 분별없는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과시하려는 듯 그 식당에서 제공하는 만찬들을 아주 세세하게 묘사하기 시작합니다. 사실 그런 묘사는 저같이 단순한 미각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어울리지도 않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저는 비겁해서였는지 아니면 의욕을 상실해서였는지 제가 그녀와 점심을 같이하지 못하겠다는 핑계는 결국 만들어내지 못하고, 그저 잘난 척하느라고 그녀와의 약속을 받아들이는 걸로 그녀가 이해하게끔 해버립니다. 저는 괴롭습니다. 제 의지와 반대로 행동하는 것일지도 모르니까 말입니다. "

     저는 비르히니아에게 해방되려는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기 때문에 부모님에게 같이 점심을 하지 못하겠다는 것을 어떤 방법으로든 알려야 합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저의 어머니는 벌써 로세달에서 저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겁니다. 기분이 좋아서,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으시고 오래전 바로 그 정원에서 찍었던, 지금은 감상적으로 보이는 색 바랜 사진에 있는 모습 그대로 벤치에 앉아 계신 모습을 상상합니다. 

     저는 시골집 복도를 지나 회칠이 벗겨진 오래된 책상으로 갑니다. 소파에 몸을 이상하게 웅크리고 주무시고 계시던 아버지를 어렵사리 깨웁니다. "어젯밤에 잠을 못 잤어" 라고 변명이라도 하시듯 말씀하시죠. 저를 보시자 무척 기분좋아 하시지요. 저는 즉시 말씀을 드립니다. "부모님과 점심을 같이 못 하겠습니다." 아버지는 완전히 잠에서 깨어나신 게 아니었기 때문에 이해하시는 데 좀 시간이 걸립니다. 그래서 급히 서둘러 부탁드리죠. "어머니한테 말씀드리세요." 아버지가 완전히 잠에서 깨어나시기 전에 저는 떠나려고 합니다. 아직은 아버지가 기분좋게 계시지만 아버지도 곧 슬퍼하실 거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요. 

     저는 이러한 고통을 부모님께 안겨드린답니다. 그리고 단지 점심 식사 때문에 저랑 사귀고 있는 (이렇게 말하다니 참 나는 야비하지요?) 한 여성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제 자신에게도 상처를 주고 있답니다. 

     그는 이러한 일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의 해석을 내렸다. 

     "그러니까 지금은 부모님을 보고 싶지 않다는 거군요."

     "저희들은 너무나 잘 지냈는데" 라고 나는 그에게 말했다. 

     내게는 설명할 힘이 없었다. 

 

- 패배한 사랑, 아돌포 비오이 까사레스 

 

***

     누군가에게 읽어보지 않은 책을 선물 받는 일은 굉장히 스릴 넘치는 일이다. 특히 작가도 소재도 장르도 전혀 모르는 상태라면 더욱. 과거에 나는 내가 읽고 싶은, 혹은 드물지만 소장하고 싶은 책을 부탁해서 생일 선물로 받는 일들이 종종 있었는데 이것은 그렇지 않았다. 이 환상문학의 대가라는 비오이의 '러시아 인형' 단편집을 선물 받은 것은 어언 2015년의 일로,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덜희' (이 글을 읽게 된다면 부끄러워할지도 모르니까 가명을 사용한다) 라는 친구의 깜짝 선물이었다. 모름지기 선물이라는 것은 1) 선물한 사람의 취향, 2) 선물한 사람이 생각한 선물 받는 사람의 취향, 3) 그 둘 사이의 어딘가, 4) 완전 랜덤 - 따위를 반영하게 된다. 이 책은 동화 작가, 일러스트레이터이기도 한 내 소중한 친구 덜희의 개인적 취향 -언젠가 그녀가 즐겁게 이 책을 읽었을 것이라는 것-과 그녀가 생각했을 때 나 역시 이 책을 제법 즐겁게 읽을 것이라는 바람 혹은 작은 확신 같은 것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일단 미국집으로 오는 길에 소중히 들고 왔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일에 관련되지 않은, 더구나 잘 모르는 작가의 '문학' 작품을 시간을 내서 읽을 마음의 여유가 오랫동안 없었다. 최근에서야 나는 아침 저녁마다 잠깐씩 짬을 내서 일과 관련되지 않은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꽤 즐거운 하루 일과가 되어버렸고 이제야 덜희의 선물을 진지하게 마주 볼 자신이 생긴 것이다. 첫 페이지를 넘겼을 때 속지에 적혀 있는 덜희의 귀여운 글씨가 '이제사 읽어볼 마음이 들었냐'고 어이없어 하는 것처럼 느껴지면서도 동시에 참 반가웠다 (Figure 1). 

 

Figure1. 보통 '간판' 작품에서 벗어난 세계 문학 도서는 애초에 재고가 많지 않기 때문에 새 것을 찾아도 어쩐지 낡아보이게 마련이라 새 책이 확실하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2015년의 나는 베리쥬스를 종종 갈아마셨나보다. 어쩌면 화장실을 잘 못 갔거나.

     '러시아 인형'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온 아돌포 비오이 까사레스의 단편집. 마지막으로 소설이라는 것을 읽은 것은 참으로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인지라 (나의 지인이라면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거다) 본격적으로 읽기 전에 약간 겁 비슷한 것까지 났다. 나에게 소설이라는 것은 당췌 어디로 데려갈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타임머신 혹은 환상 특급 열차의 트리거 같은 존재인데 "얘들고 화장실 가렴 케케케" 라니. 덜희 이 녀석은 도대체! 나는 한 번 더 마음을 가다듬고 이번에 장만한 캠핑용 의자를 방에 펼쳐서 진득이 앉았다 (캠핑사이트가 아니라 그냥 내 방이다). 그리고 몇 년의 머뭇거림이 무색하게 한참을 이 책을 붙들고 단숨에 읽어버렸다. 호흡이 짧은 단편들이 담겨 있는데도 그 짧은 글에 숨막히는 긴장감과 가끔은 충공깽스러운 반전 요소들이 들어있어 더욱 놀라운 흡입력을 보여주었던 것 같다. ㅇㅅㅇ..!! 퐈..퐌타스틱. 덜희,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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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in : 어구어구 at 2019. 7. 26. 0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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