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입니다. 오늘은 어떤 머리를 쓰면 좋을지 잠시 머리를 씁니다. 중요한 강의와 회의가 여러 건 있으니 저 머리를 써야겠군요. 잠자리용 머리를 벗어두고 그 머리를 착용합니다. 하루가 시작된 게 몸소 느껴지는군요. 평소보다 늙어 보인다구요? 저는 평소란 게 없습니다. 인상이 전체적으로 어두워 보인다구요? 이 머리를 쓰면 웃을 일이 거의 없습니다. 


    나를 알아보는 학생들이 웃으며 인사합니다. 나는 웃지 않고 고개만 까딱 숙입니다. 나는 위엄을 잃지 않으면서도 예의를 차릴 줄 아는 사람이지요. 이 머리가 날 그렇게 만듭니다. 생각하는 동물들은 응당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 머리를 쓴 친구는 참 마음에 들어요. 날 존경하는 게 느껴진다고나 할까요. 쟤는 시험 보는 날만 꼭 거창한 머리를 쓰고 옵니다. 답안지는 더 거창하지요. 


    퇴근 후, 머리를 벗어 선반에 고이 모셔둡니다. 목에 잠복해 있던 스프링이 불쑥 피어납니다. 하녀가 후다닥 뛰어와서 실내용 머리를 씌워줍니다. 주름살과 콧수염은 빚보다 더 빨리 늘어나는군요. 도무지 청산이 불가능해요. 식염수에 눈알을 세척하고 스프레이로 콧구멍을 살균합니다. 오늘은 너무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머리가 다 어지러울 지경입니다. 


    누군가 초인종을 누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실내용 머리를 벗어야겠습니다. 선반에 진열된 머리들 중 하나를 골라 쓰고 손님을 맞이합니다. IQ가 15 떨어지는 대신, EQ가 30 상승합니다. 당신은 우아하군요. 오늘따라 유독 재킷이 잘 어울리는군요. 아이들은 어찌나 이렇게도 사랑스러울까요. 이 머리만 쓰면 자동적으로 거짓말들이 줄줄 쏟아져나옵니다. 교양이 터졌다고 할까요. 


    하녀가 쿠키와 차를 내오고 우리는 대화에 몰두합니다. 가든파티에는 가실 건가요? 주식은 오늘 또 바닥을 쳤더군요. 다음달 품위는 또 어떻게 유지해야 할지 걱정이에요. 말을 마치고 우리는 웃습니다. 사이좋게 고양되고 교양됩니다. 이상하게 이 머리만 쓰면 미소가 절로 나옵니다. 차 맛이 쓰군요. 쿠키가 목구멍에 걸린 것 같아요. 재채기를 하며 어색하게 또 한번 웃습니다. 실내용 머리는 어느새 조금 늙었습니다. 


    창밖으로 낯익은 머리가 지나갑니다. 언젠가 봤던 머린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군요. 우리 어디선가 만났던가요? 아, 저 머리에는 텔레파시가 가닿지 않는 모양이네요. 손님들에게 말합니다. 아쉽지만 오늘 대화는 이걸로 끝이에요. 교양이 다 터져서 외출을 해야겠습니다. 당장 당신을 만나야겠어요. 그런데 어떤 머리를 써야 당신이 나를 알아볼까요. 일렬로 늘어선 머리들이 자기를 골라달라고 사정없이 달그락거리는군요. 


    머리 하나를 쓰고 거리를 거닐다 누군가와 부딪치고 맙니다. 성난 머리가 말합니다. 거, 머리 좀 조심하쇼. 여기 어디에 거머리가 있다고요? 당신은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군요. 성난 머리에선 이미 연기가 나고 있습니다. 나는 사람을 찾는 중이었습니다. 머리 하나가 지나갔을 텐데, 혹시 못 보셨나요? 제가 딱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는데. 수많은 머리들이 휩쓸고 간 수많은 자취들을 따라가자니, 머리가 터질 지경입니다. 고장난 나침반처럼 빙빙 회전하는 머리를,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 교양인을 이해하기 위하여, 오은.

문학동네 시인선 038 오은 시집,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

문학동네 시인선 앱에서 오은 시인의 시집을 구입해 심심할 때 (일하기 싫을 때) 읽고 있는데 정말 재밌는 시들이 많다. 몇 개의 시는 시인 낭송도 들을 수 있는데 그 점도 재미있다. 나는 논문리딩때문에 전자기기로 무엇을 읽는 것에 필연적으로 익숙한 사람이지만 시집을 전자기기로 읽는 것은 처음이라 약간 어색하기도 하다. 평소 내가 시집의 시를 읽는 방법은 시집을 들고 어딘가를 마구잡이로 펼쳐서 우연히 나오는 시를 몇 개 읽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작위로 시를 만날 수 없는 것이 전자기기로 시읽기의 단점인 것 같다. 그래도 차례의 목록에서 그 날따라 맘에 드는 제목의 시 위주로 읽는 것으로 만족한다. 

'어구어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백  (0) 2016.07.13
인생이란...... 기다림  (0) 2016.07.11
살아있는, 나라는 유일무이한 인간  (0) 2016.04.21
나는 어디?  (0) 2015.07.18
반야심경 현대어 번역  (0) 2013.08.28
Posted in : 어구어구 at 2016. 7. 7. 02:26
Currently comments want to say something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