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데미안과 활발한 논쟁을 벌인 것은 그즈음의 일이었다. 종교 수업이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내 친구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으며, 분명 상당히 시건방지고 잘난 체하는 내 말에 시큰둥했다. 


"우리는 말이 너무 많아."


그가 평소와는 다르게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게 똑똑한 말들은 아무 가치가 없어. 아무 가치도 없다고. 다만 자기 자신에게서 멀어질 뿐이야.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것은 죄악이야. 거북이처럼 완전히 자기 자신 속으로 기어 들어갈 수 있어야 해."


          그 말에 이어 우리는 교실로 들어갔다. 수업이 시작되었고, 나는 주의를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데미안은 나를 방해하지 않았다. 얼마 후 그가 앉아 있는 쪽에서 특이한 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텅 빈 것 같기도 했고 서늘한 것 같기도 했다. 마치 그 자리가 별안간 텅 빈 듯했다. 그 느낌이 가슴을 답답하게 조여 오기 시작했을 때, 나는 옆을 돌아보았다. 

          내 친구가 평소처럼 반듯한 자세로 똑바로 앉아 있는 게 보였다. 그런데도 평소와는 완전히 달라 보였다. 내가 모르는 뭔가가 그에게서 흘러나와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가 눈을 감고 있는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눈을 뜨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 그의 눈에는 시력이 없었다. 초점 없이 멍하니 내면을 향했거나 아니면 아스라이 먼 곳을 주시했다. 그는 눈썹 하나 까딱 않고 앉아 있었다. 숨도 쉬지 않는 듯했고, 입은 나무나 돌로 깎아 놓은 듯 했다. 얼굴은 핏기가 없었는데 마치 돌처럼 균일하게 창백했으며, 갈색 머리카락이 그 중 가장 생기 있었다. 두 손은 앞의 의자 위에 놓여 있었다. 물건처럼, 돌이나 과일처럼 생기 없이 가만히 있었다. 창백하고 움직임은 없었지만, 축 늘어진 것이 아니라 숨어있는 강렬한 생명을 감싼 단단하고 튼튼한 껍데기 같았다. 

          그 광경을 보는 순간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데미안이 죽었어! 이런 생각이 들었다. 


****


         정신은 깨어나면서 익숙한 감정들과 기쁨들을 변질시키고 퇴색시켰다. 정원은 향기를 잃었고 숲은 나를 유혹하지 못했다. 세상은 낡은 물건들을 바겐세일 하듯 맥없이, 매력 없이 둘러싸고 있었다. 책들은 종이였고 음악은 소음이었다. 가을의 나무에서 잎새들이 그런 식으로 떨어진다. 나무는 그걸 느끼지 못한다. 비나 햇살이나 서리가 나무를 타고 흘러내린다. 나무 안에서 생명은 가장 좁고 가장 내밀한 곳으로 서서히 옴츠러든다. 나무는 죽지 않는다. 나무는 기다린다. 


****


나는 혼자였다.



****

          


         바로 그 봄날 그 공원에서 나는 내 마음을 온통 사로잡은 젊은 숙녀와 마주쳤다. 그녀는 키가 크고 늘씬했으며 우아한 옷차림에 영리한 소년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한눈에 내 마음에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타입이었고 내 상상력을 활발하게 자극하기 시작했다. 나이가 나보다 그리 많은 것 같지는 않았지만 훨씬 더 성숙해 보였으며, 윤곽이 우아하고 뚜렷한 것이 벌써 숙녀 티가 났다. 하지만 얼굴에 오만하고 소년 같은 면이 어려 있었는데, 나는 그 점이 무척 좋았다. 

          나는 내 마음을 빼앗긴 소녀에게 한 번도 가까이 다가가 본 적이 없었다. 이번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과거 어느 때보다도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그 연모하는 마음이 내 삶에 미친 영향은 지대했다. 

갑자기 내 앞에 다시 하나의 영상이 나타났다. 연모해 마지않는 고귀한 영상. 아, 숭배하고 숭상하고 싶은 소망이 그 어떤 욕구나 충동보다도 더 깊고 격렬하게 내 마음을 파고들었다! 나는 그녀에게 베아트리체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단테의 글을 읽은 적은 없었지만, 어떤 영국 그림에서 그녀를 보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그림의 사본 하나를 간직하고 있었다. 영국 라파엘 전파 풍의 소녀 그림이었는데, 팔다리가 무척 길고 몸이 늘씬했으며 얼굴이 갸름하고 두 손과 표정에 정신이 깃들어 있었다. 내 아름답고 젊은 아가씨는 그 그림 속의 모습과 똑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늘씬함과 소년 같은 면모를 보여 주었고 얼굴에 정신이나 영혼이 깃들어 있는 듯했다. 

          나는 베아트리체와 단 한마디의 말도 나누지 못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당시 내게 무척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내 앞에 자신의 영상을 세워 놓고 내게 성스러운 신전의 문을 열어 주고 나를 신전에서 기도하게 만들었다. 그날로 당장 나는 밤에 술집을 전전하며 고주망태가 되는 짓을 그만두었다. 다시 혼자 지낼 수 있었고, 다시 즐겨 책을 읽었고, 다시 즐겨 산책을 했다. 

          내 갑작스러운 개심은 많은 조롱을 사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내게는 이제 사랑하고 숭배할 대상이 있었다. 나는 다시 이상을 품게 되었고, 삶은 다시 예감과 다채롭고 비밀스러운 여명으로 가득 찼다. 그것은 나를 조롱에 무심하게 만들었다. 비록 영상을 숭배하고 섬기는 노예로서 돌아오긴 했지만, 어쨌든 다시 나 자신에게로 돌아왔다. 

          그 시절을 돌아볼 때마다 내 마음은 뭉클해진다. 나는 내 삶의 무너져 내린 한 단계의 파편들을 모아 다시 <밝은 세계>를 일구어 내려 안간힘을 썼다. 나는 다시 내 안의 어둡고 사악한 것을 떨쳐 내고 신들 앞에 무릎 꿇은 채 완전히 빛 속에 머물고 싶은 단 하나의 소망만을 품고 살았다. 어쨌든 현재의 <밝은 세계>는 어느 정도 나 자신의 작품이었다. 그것은 어머니의 포근한 품속으로 도망쳐서 무책임하게 숨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 자신이 만들어 내고  나 자신이 요구한 새로운 직무, 책임감과 극기가 따르는 직무였다. 나를 괴롭히고 줄곧 도망치게 만들었던 성생활은 이제 그 성스러운 불길 속에서 정신과 경건함으로 승화되어야 했다. 이제 어두운 것, 추악한 것은 사라져야 했다. 신음으로 지새운 밤들, 외설적인 그림들 앞에서의 가슴 두근거림, 금지된 문 앞에서의 염탐, 욕정을 사라져야 했다. 그 모든 것들 대신에 나는 베아트리체의 영상이 있는 나의 제단을 세웠다. 나 자신을 베아트리체에게 바침으로써 곧 정신과 신들에게 바친 것이다. 나는 어두운 힘들에게서 빼낸 삶의 부분을 밝은 힘들에게 제물로 바쳤다. 이제 나의 목적은 쾌락이 아니라 순결이었고, 행복이 아니라 아름다움과 정신성이었다. 




- 헤르만 헤세, 데미안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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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원래 비행기를 타면 안전벨트 찰칵 소리와 함께 깊은 잠에 드는 편인데 다음 경유지가 있다거나 하면 깨어있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 때 주로 하는 짓이 책을 읽는 것인데 보통 짧은 단편 소설집이나 수필집, 장르문학 등을 가볍게 읽고 그마저도 없으면 전자기기에 저장되어있는 예전에 읽은 책을 또 읽는다. 그저께 그래서 데미안을 다시 읽게 되었다. 


많은 이들이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 발에 채일 정도로 많고 진부한 성장소설에 불과한데 필요 이상으로 주목을 받았다고 말한다. 나도 어느 정도 동의하지만 (진부한 성장소설맞긴함) 나는 이 책을 도저히 그렇게 쉽게 평가절하하고 싶지 않다. 적어도 나에게는 영향력이 있었기 때문이고 마치 내가 쓴 일기를 읽는 듯한 느낌마저 드는 이상한 책이기 때문이다. 또 나에게는 생택쥐페리의 '어린 왕자'만큼이나 읽을 때마다 다른 느낌을 주는 책이기도 하고. 


데미안은 실제로 만나면 무서운 미친놈이거나 상당히 골치 아픈 놈일 것 같고 방황하는 싱클레어는 혼자 이리 저리 생각하는 모습이 참 귀엽다고 생각한다. 헌데 이상하게도 싱클레어를 볼 때 나를 투과해서 보게 되고 나도 모르게 만난 적도 없는 데미안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지금 (어쩌면) 내 인생에서 가장 어두운 시기를 통과하고 있는 와중에, 내면에 호롱불 하나 켜놓고 끊임없이 고뇌하는 싱클레어를 보니 공감되는 부분이 예전보다 더 많아진 듯하다.

"나는 내 삶의 무너져 내린 한 단계의 파편들을 모아 다시 '밝은 세계'를 일구어 내려 안간힘을 썼다."  

나도 그처럼 지금을 돌아볼 때마다 마음이 뭉클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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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in : 어구어구 at 2016. 7. 27. 0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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