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진단을 받고 약물 치료를 받기 시작한 것은 2015년 봄이 막 다가오는 이맘 때 쯤이었다. 약을 먹고 베개에 머리를 뉘이자마자 나는 기절하듯 잠에 들었다. 그것이 차라리 좋았다. 사실 그대로 영원한 안식을 맞이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뒷통수에 큰 구멍이 뚫려서 시원한 바람이 드나드는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뇌는 스티로폼처럼 가벼웠고 나는 아무 감정도 느낄 수 없었으며 아무 생각도 짜낼 수 없었다. 웃고 떠드는 것은 고사하고 누가 말을 걸어도 한참을 생각해야 했고 아주 천천히 응대하거나 아예 반응하지 못했다. 나는 늘어지고 닳고 닳은 테이프처럼 아주 느리고 구리게 재생되었다. 차라리 재생되지 않는 편이 좋았다.
나는 그 때까지 한국에 들어간 적도 없었고 방학이나 휴일에도 쉬지 않고 실험을 돌렸다. 어딘가에 있을 참가자를 모집하여 주말에도 꾸역 꾸역 연구실에 나와 일을 했다. 그래도 겨울 방학엔 뉴욕에 다녀오곤 했다. 그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예상대로 내 모든 시간과 노력을 비웃듯이 진행하던 일들은 잘 되지 않았다. 봄방학이 다가왔고 침대에서 옴짝달싹할 수 없던 나를 기억한다. 마침 미쨩이 우리 동네에 놀러왔고 우린 같이 버스를 타고 켄터키에 있는 목언니 집에 갔다. 버스를 타고 가는 길이 순탄치 않았었는데 나는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에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고 짜증이 나지도 않았다. 희노애락 그 어떤 것도 느낄 수 없었고 오감조차 무뎌진 느낌이었다. 무엇을 먹어도 텍스쳐가 다른 것을 입에 쑤셔 넣는 정도의 느낌이 들었다. 그저 멍하게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저 언니들을 만나 좋았다는 기억이 난다. 좋은 것은 너무도 분명한데 아무 것도 느낄 수가 없으니 마치 무언가를 흉내내듯이 웃었다. 좋아하는 이들을 오랜만에 만났는데 혹시 분위기를 망칠까 차마 내가 아프노라고 말할 수 없었다. 눈물도 나지 않았다.
나의 좋지 않은 상태 때문에 직간접적 피해를 입을 수 있는 동료들과 지인들에게 사실 내가 멀쩡하지 않노라고 말했다. 그것은 생각보다 너무도 어려웠으나 당시엔 아침에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나 이를 닦고 세수하는 것조차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 와중에 나라는 미친놈은 많은 이들 앞에서 연기를 하듯 웃고 말하고 행동하기도 하였다.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일종의 사회적 생존을 위한 반사적 행위였다. 그리고 혼자가 되면 피를 토하듯이 괴로워했다. 아무렇지 않게 굴었지만 사실 아무런 짐덩어리 족쇄 계집애 같으니. 사실은 차라리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 때 그렇게 애쓰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