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병일지 - 29

  1. 2019.05.15 나의 사랑스런 연인
  2. 2019.05.10 어느 날이었다. 2
  3. 2019.04.02 사랑을 하세요
  4. 2018.05.09 요즘은 말이지 2
  5. 2017.03.07 2년 전
  6. 2017.02.11 오랜만에
  7. 2017.01.27 요즘은
  8. 2016.12.31 연말
  9. 2016.11.16 어휴휴
  10. 2016.10.07 의사 선생님

내가 나의 소중한 연인을 본격적으로 만나기 시작한 것은 작년 여름의 일로, 사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약 일 년 전, 너무도 끔찍한 고통에 결국 3주 정도 격리 병동에서 입원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 삼엄한 병동의 귀찮은 절차도 마다 않고 찾아와준 소중한 사람들 중 한 명이 지금의 나의 연인이다. 보드 게임을 유난히 좋아하는 그는, 내 문병에도 얼굴 맞추기 게임 같은 이상한 보드 게임을 들고 왔다. 그 때까지 연구 외에 둘만의 사적인 교류를 많이 해본 사이는 아니었어서 꽤나 어색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함께 연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공동 연구를 하면서 적어도 연구자로서의 호감과 존경심 같은 것은 당시의 서로에게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함께 대화를 나누면 즐겁고 묘한 편안함이 있어서 (영어인데도 마치 모국어로 대화를 나누는 듯한) 다른 사람들에 비해 그 이전에도 그와 함께 이야기 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나는 면허도 없고 차도 없어 퇴원하는 것도 쉽지 않았는데 퇴원하는 날도 그가 묵묵히 도와주었다. 그 날은 바깥 날씨도 좋았고, 더군다나 나는 정말 오랜만에 밖에 나온 것이라, 집으로 바로 가서 쉬지는 못할 망정! 내가 좋아하는 레스토랑에서 점심도 같이 먹고 근처에 있는 줄도 몰랐던 작은 공원에도 들렀다. 초여름의 햇살과 풀 냄새를 킁킁 대며 아무 말 없이 둘이서 한참을 풀 밭 위에 누워있었다. 어 뜨듯하다 그리고 그 날부터 1일......?이 되었는데?? ? 어느덧 벌써 일 년이 다 되었다. 나는 보통의 꽁냥대는 연애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었고 나의 연인은 사랑이 뭐죠? 먹는 건가요 와구와구 공부 밖에 모르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우리의 연애가 과연 순탄할 것인지 의심한 날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언제나 손을 꼭 잡고 무언가에 신난 아기곰처럼 (산에서 들에서 때리고) 뒹굴고 (사막에서 정글에서 울다가) 웃다가 매일 종알종알 수다를 떨고 어떤 것은 함께 고민도 해가며 부산스럽게 잘 살아가고 있다. 사랑합니다! 아패로도 개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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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in : 투병일지 at 2019. 5. 15.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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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힘이 들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더이상 남들에게 폐 끼치지 말고 이 길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진지하게 생각해보았다. 나는 이 길을 걸으면 안되는 것이 아닐까? 내가 아픈 것은 내가 분수에 맞지 않는 일을 하려고 해서가 아닐까? 이 일을 하기에 나는 너무도 멍청하고 게으른 것이 아닌가? 수많은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앉아서 앞으로 하고 싶은 것, 이루고 싶은 것, 혹은 단순히 미래에 관한 것을 떠올려 보았지만 그저 눈 앞이 깜깜하기만 했다. 바로 내일 내가 무엇을 해야할지조차 생각할 수 없게 되었고 평소에 즐거워 하던 것들마저 할 수 있는 기력이 생기지 않았다. 대학 시절만해도 분 단위로 하루 하루 잠까지 줄여가며 살아왔던 나였는데 침대에서 일어나 세수를 하는 것 정도의 일이 힘에 붙이게 될지는 꿈에도 생각해본 일이 없다. 나에게는 일어날리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완전히 고장나버렸다고 생각했다. 수리하려고 해도 부품이 없어서 고칠 수 없는 아주 낡고 작은 장난감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누가 나를 들고 갖고 노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렸을 때, 나는 여러 학자들이 일하는 모습이 담긴 다큐멘터리를 보고 또 보는 것을 좋아했다. 그 중엔 내 분야의 꼬꼬마 하룻강아지들도 알 법한 저명한 대가 교수님도 계셨다. 미국에서, 세계 속의 명문대로 익히 들어 알고 있는 학교에서 자신의 연구실을 운영하며 열정적으로 연구하고 학생들을 지도하고 강의를 하는 모습과 인터뷰가 담겨있는 다큐멘터리였다. 나는 그 영상으로 그 분의 실제 모습을 처음 보았는데, 벌써 백발이 성성한 것이 내 생각보다 훨씬 나이가 들어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진부한 표현이지만, 그 분의 눈에 담긴 연구에 대한 진지한 열정, 설렘 같은 것은 이제 막 나와 활발하게 세상을 탐험해나가는 신생아의 호기심처럼 신선해보였다. 그 시절,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 분은 여전히 내가 몸 담은 분야에서 왕성히 연구를 하는 학자로서, 마치 세상의 이치를 깨우친 구루, 손에 닿을 수 없는 신 같은 존재로 여겨지고 있다. 어린 시절과 지금 유일한 차이가 생겼다면, 지금의 나는 그 분을 매년 학회에서 직접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직 나 따위가 감히.. 하는 생각으로 그 분께 진지한 대화를 요청해본 일은 없지만, 그 분의 파티에 가서 악수를 하고 인사를 나누었던 경험은 지금도 신기하게 느껴질 따름이다. 그 분이 직접 말아주신 바닷빛의 마르가리타도 생각난다. 당시 내가 주종을 가리지 않고 술을 굉장히 좋아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독해서 깜짝 놀랐던 기억도 함께 난다. 그렇다. 나는 비틀거리고 분명 쉽지 않은 시간들을 보냈지만, 어쨌든 조금씩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나의 이 작은 깨달음과 수많은 좋은 분들의 도움, 그리고 지지에 힘입어 나는 포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매일 매일 무엇이든 기록하는 습관을 만들었고 충분히 자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 운동을 하고 책을 읽고 청소, 정리를 하고 건강에 좋은 음식을 먹고 작은 것에 감사하는 일을 잊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러자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내가 무엇에 즐거움을 느끼는지 예전처럼 다시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앞으로의 하루 하루를 늘 함께 보내고 싶은 사람도 만날 수 있었다. 힘들어했던,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에 고통스러워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나는 더이상 과거가 아니라 어찌됐든 목숨이 붙어 있는 상태로, 앞으로의 시간을 살아가고 싶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문득 이미 너무 늦었다는 생각에 조바심이 나고 정말 내가 할 수 있을까 확신이 서지 않고 그저 죄스럽고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럴 때마다 최근에 읽은 책 속 일화를 떠올려 본다. 어느 작가가 90세의 할머니에게 지금까지 인생에서 후회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 할머니는 60세 무렵에 바이올린을 다루고 연주하는 법을 배우고 싶었는데 당시 너무 늦었다는 생각에 포기한 것이라고 답하셨다 한다. 그 때 시작했으면 30년은 연주할 수 있었을텐데 하고 그것이 후회가 된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인생의 통찰이 깊이 배어있다고 생각하는 박명수 님 어록 중에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정말 늦을 때다.' 라는 것이 있다. 정말 늦은 것 맞다. 하지만 뭐 어쩌란 말인가.

 

올해가 가기 전에 좋은 소식과 함께 꼭 연락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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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in : 투병일지 at 2019. 5. 10. 0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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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사랑. 

 

어찌됐든 좀 더 살고 싶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것 같습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좋은 시간을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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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in : 투병일지 at 2019. 4. 2.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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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학기가 끝나서 강의 부담도 없고 모든 것이 나름대로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여전히 할 일은 무척 많지만, 예기치 못한 엄청난 스트레스 요소가 외부에서 발생하지 않는 한, 나 혼자서 스스로는 어찌 저찌 잘해 나가고 있다는 그런 느낌. 꽤나 즐거운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단지 이게 체질상 혹이나 돌 같은 게 몸에 잘 생겨서 그런 건지 (그런 것들이 여기 저기 꽤 크게 생겨서 꽤 어렸을 때부터 암인지 아닌지 혹은 뇌종양인지 검사를 몇 번이나 받아야 했다) 공부를 존나게 쳐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는데 눈에 계속 결석이 생기고 있다. 안과 대학에서 진료를 받았을 땐 그 자리에서 즉시 제거해주셨다 (미처 맘의 준비도 동의도 없이..). 그 때 그것들이 작았던 건지 뭔지 모르겠지만 이번엔 훨씬 커서 외부에서 보일 정도고 몇 주에 거쳐 양 쪽 눈에 그대로 있는데도 제거해주지 않으셨다. 뭔가 근본적인 치료를 추구하시는 건지 뭔지는 모르겠는데 전자렌지에 돌려 쓸 수 있는 아이 마스크랑 눈꺼풀 전용 클렌징 패드 (야 그런 것도 있더라 깜짝 놀랐다데스), 흔들어서 쓰라는 항생제가 든 안약을 주셨다. 하루 종일 가능한 자주 무슨 막 대여섯번, 열 번 계속 막 주구장창 아이 마스크를 사용하라고 했는데, 아침부터 저녁까지 연구실에 종일 있다가 늦은 저녁 - 밤 정도 돼서야 집에 오는데 매일 이걸 여러 번 쓰라는 게 현실적으로 말이 되냐? 입 밖으로 말은 안 했지만 어이가 없어서 그 자리에서 웃어 버렸다. 당장 다음 주에 일주일 동안 학회 일정이 있어서 도저히 이 꼴로는 가고 싶지 않아 무척 신경질을 내며 (내 생각엔 무척) 온갖 짜증을 부렸는데도 통하지 않았다. 자기가 보기엔 외부에서 봤을 때 전!!혀! 티나지 않는다며 !! 너만 아는 차이라능 ^^ 이러는데 정말이지, 기가 찼다. 내가 졌다. 꽤나 꼬장 꼬장한 할줌마였다. 제길^^? 하지만 본디 빌어 먹을 성격상 더는 개짜증을 못 내고 곧 모든 걸 못내 받아 들였다. 일단 하라는 대로 열심히 하기로 약속하고 다음 주에 학회가기 전 날 다시 만나기로 했다. 헤어지기 전에 그래서 이번 것도 결석인가요? 묻자 할줌마 으사 선생 왈,

"이번엔 수많은 결석들이 합체된 형태야. ^^ "

"아 ....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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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확히 진단을 받고 약물 치료를 받기 시작한 것은 2015년 봄이 막 다가오는 이맘 때 쯤이었다. 약을 먹고 베개에 머리를 뉘이자마자 나는 기절하듯 잠에 들었다. 그것이 차라리 좋았다. 사실 그대로 영원한 안식을 맞이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뒷통수에 큰 구멍이 뚫려서 시원한 바람이 드나드는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뇌는 스티로폼처럼 가벼웠고 나는 아무 감정도 느낄 수 없었으며 아무 생각도 짜낼 수 없었다. 웃고 떠드는 것은 고사하고 누가 말을 걸어도 한참을 생각해야 했고 아주 천천히 응대하거나 아예 반응하지 못했다. 나는 늘어지고 닳고 닳은 테이프처럼 아주 느리고 구리게 재생되었다. 차라리 재생되지 않는 편이 좋았다. 

          나는 그 때까지 한국에 들어간 적도 없었고 방학이나 휴일에도 쉬지 않고 실험을 돌렸다. 어딘가에 있을 참가자를 모집하여 주말에도 꾸역 꾸역 연구실에 나와 일을 했다. 그래도 겨울 방학엔 뉴욕에 다녀오곤 했다. 그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예상대로 내 모든 시간과 노력을 비웃듯이 진행하던 일들은 잘 되지 않았다. 봄방학이 다가왔고 침대에서 옴짝달싹할 수 없던 나를 기억한다. 마침 미쨩이 우리 동네에 놀러왔고 우린 같이 버스를 타고 켄터키에 있는 목언니 집에 갔다. 버스를 타고 가는 길이 순탄치 않았었는데 나는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에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고 짜증이 나지도 않았다. 희노애락 그 어떤 것도 느낄 수 없었고 오감조차 무뎌진 느낌이었다. 무엇을 먹어도 텍스쳐가 다른 것을 입에 쑤셔 넣는 정도의 느낌이 들었다. 그저 멍하게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저 언니들을 만나 좋았다는 기억이 난다. 좋은 것은 너무도 분명한데 아무 것도 느낄 수가 없으니 마치 무언가를 흉내내듯이 웃었다. 좋아하는 이들을 오랜만에 만났는데 혹시 분위기를 망칠까 차마 내가 아프노라고 말할 수 없었다. 눈물도 나지 않았다.

          나의 좋지 않은 상태 때문에 직간접적 피해를 입을 수 있는 동료들과 지인들에게 사실 내가 멀쩡하지 않노라고 말했다. 그것은 생각보다 너무도 어려웠으나 당시엔 아침에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나 이를 닦고 세수하는 것조차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 와중에 나라는 미친놈은 많은 이들 앞에서 연기를 하듯 웃고 말하고 행동하기도 하였다.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일종의 사회적 생존을 위한 반사적 행위였다. 그리고 혼자가 되면 피를 토하듯이 괴로워했다. 아무렇지 않게 굴었지만 사실 아무런 짐덩어리 족쇄 계집애 같으니. 사실은 차라리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 때 그렇게 애쓰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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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in : 투병일지 at 2017. 3. 7.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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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달만에 follow-up으로 의사 선생님을 만났다. 이 분을 뵌지도 거의 2년이 다 된 것 같다. 그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몇 번을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다른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하는 가장 일상적이고 기본적인 생활도 죽을 힘을 다하고 이를 악물고 몇 번이나 울어야 비로소 할 수 있었다. 그렇다. 나는 어쩌면 살면서 내 인생 가장 밑바닥을 본 것이 아닐까.

   지난 한 달은 아주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아주 눈에 띄게 희망차고 좋은 달이었다. 카운셀러 선생님께 칭찬 받을 일이 여럿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그렇다고 해서 너무 업돼가지고 까불면 넘어진다고 하셨다. 그건 나도 무척 잘 아는 바였다. 그렇게 넘어져 버리면 더욱더 아플 것이고 다시 일어나기 힘들 것이었다. 그래도 나는 그저 절망적인 수준의 자존감으로 아무 희망도 기대도 없이 살아온 나에게 겉으로나마 야 너 이녀석 참 잘했다, 대견하다 중얼거리며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 주고 싶었을 뿐이다. 

   오늘 어떠세요, 하고 되물으면 약간은 sarcastic 한 느낌으로 '낫 베드!' 라고 대답하시는 이 분. 오늘 의사 선생님은 수치가 10 이상 떨어졌다면서 기뻐하셨다. 나도 기뻤다. 약 먹는 것을 유지하면서 무려 3개월 뒤에 보자고 하셨다. 3개월. 3개월이라니. 

   그저께 우리 영역 교수님들이랑 대학원생들 앞에서 한 발표도 성황리에(?) 마쳤고, 새 친구도 사귀었고, 운동도 매일 매일 잘 하고, 사람들도 만나고 학회에 낸 초록도 승인 받았다. 올해도 볕 좋은 플로리다 해변가에서 발표를 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올해는 내 인생 통틀어 가장 기억에 남을 한 해가 되지 않을까. 토나올 정도로 더러운, 밑도 끝도 없는 진흙탕에서 비로소 발을 빼낸 한 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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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in : 투병일지 at 2017. 2. 11. 0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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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강하고 다행히 상태가 많이 좋아져서 약간 느리지만 큰 무리 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 특히 몸에 좋은 것들을 적당한 양으로 나눠 삼시세끼로 챙겨 먹는 동시에 간단한 운동을 병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까 수면 문제가 호전되면서 평생동안 경험해본 적 없던 '일찍 일어나고 일찍 자는' 생활이 가능해졌다. 오 개짱인데? 체중도 빠지고 피부도 좋아진데다 술담배도 다 끊었더니 이제는 거울을 보면 왠 스님이 있음. 스님됨 ^^ 염화미소 ^^ 가끔 일에 손이 안 잡히고 가슴이 너무 답답하고 한숨 나오긴 하는데 맛있는 거 먹으면 좋아지는 듯 (단순) 사람들이랑 같이 있는 것도 약간 편해진 듯도 하고 뭔가 신기하다. 좋은 변화인 것 같긴 한데 약간 외로움 비슷한 게 같이 생겨버린 것 같다. 좋은 이웃이라도 생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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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기가 끝나고 잠깐 워싱턴 디씨랑 볼티모어에 다녀왔다. 두 곳 다 처음 가본 도시기도 하고 친구들이 있는 곳이기도 해서 좋은 구경도 많이 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왔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서 거의 열흘 정도 생활이 좀 힘들 정도로 안 좋아졌다. 잘 쉬고 온 듯해서 더욱 이유가 뭔지 알 수가 없다. 한동안 안 하던 생각에도 아무렇지 않게 깊이 깊이 빠져버리고 만다. 자리에서 움직이기도 힘든 그런 시간들. 그동안 다 겪어본 고통. 이미 알고 있는 지친 마음. 역시 또 오는 구나.  


          " 왜? " 에 대해서 한참을 생각해봤는데 정말 모르겠다. 그러나 심호흡을 크게 하고 초조해하지 않기로 한다. 마음 속에 파도가 일어나지 않도록, 이미 알고 있는 고통에 똑같이 흔들리지 않도록 나를 붙잡아야 한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괜찮다. 별 것 아니다. 라고 안으로 안으로 되뇌어 본다. 뭔가 이런 것이 통했는지 그저께부터는 다시 집구석 구석 잘 정리하고 비록 재택근무였지만 일도 계속 했다. 유동식이라도 무엇이라도 만들어서 한 그릇이라도 먹었다. 


         그래서 오늘은 드디어 외출에 성공했다. 외식도 하고 좋은 식재료들을 먹을만큼 사왔다. 크리스마스 즈음엔 상태가 안 좋았기 때문에 자축? 같은 것을 하지 못했는데 연말연시는 혼자 근사하게 보낼 수 있도록 좋아하는 스파클링 와인도 사왔다. 병신 같은 년이 가고 내년은 뭔가 좀 나아질까? 하는 초조한 의문도 물론 들지만 희망도 기대도 없이 담담하게 맞이할 예정이다. 새해 계획은 좋은 연구를 해서 학위를 취득하는 것, 건강해지는 것, 심플하게 사는 것 - 이 세가지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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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작용 때문에 근래 간신히 좋아진 상태마저 다시 안 좋아질까봐 저번 달에 추가로 처방해준 약을 안 먹었노라 이실직고 했다. 왠지 모를 죄책감이 컸었는데 의사선생님은 그럴 수도 있는 것이라고 괜찮다고 하셨다. 그래도 기존 약은 잘 먹고 있고 감기 기운 때문에 몸이 좀 안 좋아 해야할 일이 좀 미뤄지기도 했지만 이 정도면 선방한 한 달이 아니었나 싶다. 

     이어진 의사선생님의 '어떻게 지냈냐'는 한결 같은 물음에 '실험을 했는데 망해서 새 실험을 하고 있어요'라고 한결 같은 대답을 했다. 그리고 또 눈물이 날 뻔 ㅠㅠ 

     너무 자주 겪는 일이라 이제는 정말 익숙해질만도 한데 역시 노력해도 소용 없다는 깨달음은 항상 놀라움으로 다가온다. 별안간 와장창!! 하는 큰 소리를 들은 것처럼 늘 또 똑같이 놀라고 만다. 

     교수님께서는 이 모든 시행 착오들이 헛된 것이 아님을 강조하시지만 결과가 없는 실험이라는 것은 참으로 헛되다. 결과가 없다면 그냥 허송세월 보낸 루저일 뿐이지 그간 공들인 노력 따위는 아무도 쳐다봐주지 않는다. 평가의 대상 자체가 아닌 것이다.

     배려받은만큼 토해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서 점점 내적, 외적 압박이 심해진다. 똑똑한 놈이 살아남는 게 아니라 버티는 놈이 살아남는다더니 그 말이 참 맞다. 내가 지닌 건 똑똑한 머리도 아니고 근성 뿐이었기에 처음 그 말을 들었던 시절엔 솔직히 진짜 자신있었다. 버티는 것. 내가 제일 잘 하는 것. 지금은 발디디면 와자작 다 부서져 버릴 것 같은 오래된 징검 다리 같은 게 되어버렸다. 나무가 다 썩어 속까지 텅 비어 버렸는데도 뭐가 이렇게 무거운 걸까? 어린 아이의 작은 한숨에도 롯데월드 자이로 스윙 뺨치게 흔들거릴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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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저런 사유로 한 달 넘게 못 뵙다가 뵌 의사 선생님. 세션에서와는 달리 담담하게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상태는 어떤지, 무엇이 좋아졌고 무엇이 여전히 힘든지 다소 건조하게 별일 아닌 것처럼 말할 수 있었다. 원래 이게 증상이 심할 때는 아예 말을 잘 못하게 되거나 해도 아주 천천히 더듬더듬 말하기 때문에 이번에 아마 놀랐을거다 ㅋㅋㅋㅋㅋㅋㅋ내가 말을 너무 유려하게 조목조목 잘해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내가 여태 영어 못하는 줄 알았지? ㅋㅋㅋㅋㅋㅋㅋ 

          의사 선생님은 평소보다 더 엄청난 속도로 내가 말하는 걸 타이핑하셨다. 그리고 지지부지했던 지난 일년여의 시간들이 정적으로 잠시 깔리고, 드디어 눈에 띄게 호전된 상태에 안도하고 웃으며 대화할 수 있었다. 의사 선생님도 무척 기뻐보였다. 잘 모르는 남의 일인데 어째서 함께 일희일비하는지 나는 처음엔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내가 가르치던 과외학생들이 성적이 개오르면 나까지 기쁘던 일이 떠올라 이제는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아직 좋아지지 않는 부분들을 조절해줄 약을 추가로 처방받았고 앞으로 한 달동안 다시 경과를 지켜볼 것이다. 사실 예전에 높은 함량으로 처방 받았다가 잘 움직이지도 못하고 일어나지도 못하고 음식 섭취도 못해서 몇 번 쓰러지는 바람에 결국 중단했던 약이라 좀 걱정은 되지만.. 이번엔 적은 함량이니 지금 먹는 약과 시너지를 내서 더 상태가 좋아지길 하는 바람이다. 

         예전에도 다 죽어가는 분위기를 좀 덜 슬프게 해보려고 내가 좋아하고 관심있는 것들에 대해서 물어봐주시고 같이 얘기하고는 했지만 (연구 얘기, 맥주 종류, 알콜 함량 얘기라든가 물고기 기르기 얘기 같은 것들 ㅋㅋ) 이번엔 트럼프의 병크에 대한 얘기나 의사선생님이 좋아하는 캐나다 롹밴드 얘기 (의사선생님은 미국에 오래 산 캐나다 사람) 같은 것들을 진심으로 낄낄대면서 했다. 되게 이상한 이름의 롹밴드였는데 나는 그걸 또 벌써 까먹었다. 뭐였지? 밴드명이 몬가 되게 병맛이었는데?  그런데 선생님은 그 롹밴드를 미친놈처럼 좋아하시는지, 그 밴드가 여태 미국에서 공연을 못하고 있는 것이 자신이 미국에서 오래 살았지만 아직도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단 한 가지 미국의 이상한 점이라고 했다. 음 그렇군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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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in : 투병일지 at 2016. 10. 7. 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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