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는 목수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질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위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지도 않고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 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 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위 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백석.




요즘 틈날 때마다 책을 많이 읽는데 (미니멀리즘 정신에 입각해서 무조건 e-book. 논문도 마찬가지.) 오늘은 일하기가 싫어서 최근에 구입한 백석 시집을 읽었다. 백석은 수능 언어영역 문학을 공부하는 데 있어서 모를 수가 없는 분이자 대표적 훈남 시인인데 (..) 시험 공부 맥락에서 벗어나 그의 작품들을 접한 것은 부끄럽지만 처음인 것 같다. 서정적이고 향토색이 짙게 묻어나면서도 동시에 세련되고 감각적으로 언어를 조탁하는 탁월한 능력을 지닌 분 같다는 생각을 새삼 했다. 


아주 생생하게 눈 앞에 펼쳐지는 듯한 시를 많이 쓰셨는데, 그 중 먹을 거리에 대한 묘사가 놀랍도록 뛰어났다. 레알 시로 먹방찍는 각 ㄷ ㄷ 사실 그런 시를 소개하고 싶었는데, 지금 현재 내가 가장 공감할 수 있었던 시를 뽑자니 결국 대표작 중 하나인 이 시를 올리게 되었다. '남신의주 유동에 사는 박시봉네 집에서' ? 정도의 제목인데 불현듯 정신차려보니 모든 것을 잃은 화자가, 결국 자기 몸 하나 뉘일 방 하나 빌려서 슬픔과 괴로움, 쓸쓸함에 방바닥을 뒹굴 거리며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다. 그는 결국 자신의 중심을 잃지 않으려 그저 담담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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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in : 어구어구 at 2017. 3. 8.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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