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속에는 저녁 풍경이 흘렀다. 비쳐지는 것과 비추는 거울이 마치 영화의 이중노출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등장인물과 배경은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게다가 인물은 투명한 허무로, 풍경은 땅거미의 어슴푸레한 흐름으로, 이 두 가지가 서로 어우러지면서 이세상이 아닌 상징의 세계를 그려내고 있었다. 특히 처녀의 얼굴 한가운데 야산의 등불이 켜졌을 때, 시마무라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가슴이 떨릴 정도였다.
아득히 먼 산 위의 하늘엔 아직 지다 만 노을빛이 아스라하게 남아,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먼 곳까지 형체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색채는 이미 다 바래고 말아 어디건 평범한 야산의 모습이 한결 평범하게 보이고 그 무엇도 드러나게 주의를 끌 만한 것이 없는 까닭에, 오히려 뭔가 아련한 커다란 감정의 흐름이 남았다. 이는 물론 처녀의 얼굴이 그 속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차창에 비치는 처녀의 윤곽 주의를 끊임없이 저녁 풍경이 움직이고 있어, 처녀의 얼굴도 투명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정말로 투명한지 어떤지는, 얼굴 뒤로 줄곧 흐르는 저녁 풍경이 얼굴 앞을 스쳐 지나는 듯한 착각을 일으켜 제대로 확인할 기회가 잡히지 않았다.
기차 안도 그리 밝은 편은 아니었고 진짜 거울처럼 선명하지도 않았다. 반사가 없었다. 그래서 시마무라는 들여다보는 동안, 거울이 있다는 사실을 점차 잊어버리고 저녁 풍경의 흐름 속에 처녀가 떠 있는 듯 여기게 되었다.
바로 그 때, 그녀의 얼굴에 등불이 켜졌다. 이 거울의 영상은 창밖의 등불을 끌 만큼 강하지는 않았다. 등불도 영상을 지우지는 못했다. 그렇게 등불은 그녀의 얼굴을 흘러 지나갔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을 빛으로 환히 밝혀주는 것은 아니었다. 차갑고 먼 불빛이었다. 작은 눈동자 둘레를 확 하고 밝히면서 바로 처녀의 눈과 불빛이 겹쳐진 순간, 그녀의 눈은 저녁 어스름의 물결에 떠 있는 신비스럽고 아름다운 야광충이었다.
-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 중.
이걸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나는 한숨이 나와버렸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문체를 설명하는 진부한 단어로 '섬세함'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내 생각에 표현의 진부함을 떠나서 이건 '섬세'라는 단어만으로는 좀체 설명할 수 없다. 저릿하게 느껴지는 작가의 극한의 관찰력. 눈의 나라를 달리는 열차 안에서 차창에 비친 여자의 얼굴과 그 너머로 빠르게 지나치는 풍경의 흐름이 겨울의 찬 습기에 착 달라 붙어 있는 광경이 내 눈 앞에서 그대로 재생되어 버렸다. 마치 '눈에 등불이 켜진 여자'의 얼굴, 그 위 보송한 솜털에 앉은 겨울의 차가운 기운, 아주 작은 물방울까지 봐버린 것 같다. 차라리 이것은 뱃 속이 묘하게 간지러운 듯한 느낌과 비슷하다. 으윽. 역설적으로 나는 현실의 감각을 잃어버리고 약간 멍해져 버렸다. 멍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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