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살게 된지 이제 꽤 오래되었다. 그동안 여기 살면서 '이건 확실히 사는데 제법 도움이 된다' 생각한 게 몇 가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수상 혹은 위험해보이지 않을 것'. 동양 여자에 대한 편견이 있어 왠만해선 그렇게 봐주지 않기도 하지만 개개인을 중시하고 언제 어디서 빵야 빵야 시밤쾅할지 모르는 곳이다보니 분명 모두에게 보이지 않는 가드같은 것이 존재하고 자연스레 나도 지니게 되었다.  

     여태 운전 버진인 게으른 나는 다른 도시에서나 공항 왕복을 해야할 때 우버를 애용하는데 나의 가드는 그 때 많이 올라가는 것 같다. 워낙 범죄 관련 다큐나 창작물을 좋아해서인지 '남이 모는 차' 라는 배경에 아주 자연스럽게 신경이 곤두서는 것이다. 오늘은 밤 비행기로 주말 동안 잠시 시카고에 갈 예정이라 공항에 가려고 우버를 불렀는데 기사님의 첫인상이 범상치 않았다. 우리 동네에선 흔치 않은, 바로 내가 티비에서나 가끔 보는 금목걸이 쩔렁 쩔렁 뻔쩍 뻔쩍 형님 샤쓰를 걸친 그런 분이었다. 보통 트렁크에 넣을 짐이 있으면 기사님들이 트렁크를 열어주고 짐도 대신 들어서 넣어주시는데 이 놈 아니 이 분은 운전 좌석에 앉아 고개 하나 내보이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쿨한 첫만남에 나는 아마 그 때부터 제법 긴장을 했을 것이다. 뭐 짐 같은 것은 아무렴 나 스스로 얼마든지 번쩍 번쩍 들 수 있기 때문에 알아서 트렁크에 짐을 잘 넣고 조심스럽게 뒷좌석에 앉았다. 우리 동네는 이제 제법 추운데 창문을 앞 뒤로 열어 놓고 달리는 것이, 자유로운 영혼 혹은 흡연자의 습성 같기도 했다. 예전엔 나도 한동안 그렇게 살았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일단 안전 벨트부터 채웠다. 공항 가는 길은 차로 25-30분 정도 걸린다. 나는 어릴 때부터 미용실에 가든 남의 차를 타든 모르는 사람과는 대화없이 조용히 있는 것을 선호하는 쭈구리라 우리는 그렇게 나로 인해 반강제적으로 침묵 속에 함께 차를 타고 달리고 있었다. 정작 운전을 하는 그는 그것이 썩 편치 않았는지 아니면 오늘따라 그냥 좀 심란한 일이 있었는지 블루투스로 노래를 엄청난 볼륨으로 틀기도 하고 좀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리 저리 채널을 돌리기도 했다. 아 이게 혹시 말로만 듣던 흑형의 초조한 스웩 같은 건가 하는 생각도 들고 나는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그저 한동안 창 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공항에 가까워오자 나는 항공사를 알려줄 요량으로 그 쪽을 바라보았는데 아니 이 놈이 아니 이 사람이 운전 중에 앞은 안 보고 폰만 보고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한참을! 아니 대체 얼마나 저러고 운전을 해온 것인가! 저정도의 운전 중 딴짓은 우버에 대충 귀띔만 해줘도 바로 전액 환불과 사과 메일을 받기 마련이라 공항에 도착하는대로 항의 메일을 써주는 것이 서로에게 좋겠군 이라고 생각하던 중 그가 갑자기 깜빡이 비슷한 것도 없이 내게 말을 걸었다.

 

"너.. 셀린 디온 알아?"

- ".................?..으응?"

 

난 그 때야 그 사람의 얼굴을 처음으로 제대로 보았다. 나야말로 내멋대로 그가 험상궂게 생겼을 거라고 생각했었는지 내 생각보다 훨씬 어리고 순진해보이는 얼굴로 그는 미소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이거 셀린 디온 노랜데.. 셀린 디온 알아?"

- "응 알지 타이타닉아님? ㅇㅇ"

 

"응응 그 셀린 디온이 이번 주 일요일에 콜럼버스에 공연와"

- "아.. 그렇구나. 너도 갈거야?"

 

"(만개한 미소) 응! 꼭 가야지.이 노래 셀린 디온이 불어로 부른 건데 내 모국어가 불어거든?!" 

 

-하면서 그는 불어로 졸라 자유롭게 셀린 디온의 노래를 크게 따라 부르기 시작했고 그는 무척 행복해보였다. 그 순간 나는 항의 메일을 쓰는 건 그만두자고 생각했다. 그는 그저 며칠 뒤 자기가 좋아하는 셀린 디온을 직접 보고 모국어로 노래를 따라부를 생각에 조금 들떴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동안 쑥쑥 올라가있던 내 가드가 주르륵 힘없이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의 마중을 받으며 공항에 잘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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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in : 두랄루민 at 2019. 10. 19.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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