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대들에게 정신의 세 가지 변화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어떻게 하여 정신이 낙타가 되고, 낙타는 사자가 되며, 사자는 마침내 아이가 되는가를.

   내면에 외경심이 깃들여 있는 강력한 정신, 인내심 많은 정신은 무거운 짐을 잔뜩 지고 있다. 그 정신의 강인함은 무거운 짐을, 가장 무거운 짐을 요구하는 것이다. 

   무엇이 무겁단 말인가? 인내심 많은 정신은 이렇게 물으며 낙타처럼 무릎을 꿇고는 짐을 가득 싣고자 한다.

   그대 영웅들이여, 가장 무거운 짐은 무엇인가? 내가 짊어지고 나의 억센 힘에 기쁨을 느끼게 될 가장 무거운 짐은? 인내심 많은 정신은 이렇게 묻는다.

   자신의 오만에 고통을 주기 위해 자신을 낮추는 것, 자신의 지혜를 조롱하기 위해 자신의 어리석음을 드러나게 하는 것, 이것이 가장 무거운 짐인가?

   아니면 우리가 일이 승리를 구가할 때 그 일로부터 물러나는 것, 유혹하는 자를 유혹하기 위해 높은 산으로 올라가는 것, 이것이 가장 무거운 짐인가?

   혹은 깨달음의 도토리와 풀로 연명하면서 진리를 위해 영혼의 굶주림을 참고 견디는 것, 이것이 가장 무거운 짐인가?

   아니면 병석에 누웠으면서도 문병 오는 자들을 돌려보내 버리고, 그대가 들려주고자 하는 바를 결코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와 우정을 맺는 것, 이것이 가장 무거운 짐인가?

   혹은 진리의 연못이라면 더럽더라도 그 속으로 뛰어들어 차가운 개구리도 뜨거운 두꺼비도 물리치지 않는 것, 이것이 가장 무거운 짐인가? 

   혹은 우리를 경멸하는 자들을 사랑하고, 유령이 우리를 위협하더라도 그 유령에게 손을 내미는 것, 이것이 가장 무거운 짐인가?

   인내심 많은 정신은 이 모든 무겁기 그지없는 짐을 짊어지고 그의 사막을 달려간다. 가득 짐을 실은 채 사막을 달리는 낙타처럼. 

   하지만 고독하기 그지없는 사막에서 두 번째 변화가 일어난다. 여기에서 정신은 사자가 된다. 정신은 자유를 쟁취하려 하고 사막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 

   정신은 여기에서 그의 마지막 주인을 찾는다. 정신은 마지막 주인, 최후의 신에게 대적하려 하며, 승리를 위해 정신은 이 거대한 용과 일전을 벌이려 한다. 

   정신이 더 이상 주인으로 신으로 여기지 않으려는 거대한 용은 무엇인가? 너는 해야 한다. 이것이 그 거대한 용의 이름이다. 그러나 사자의 정신은 이에 대항하여 "나는 원한다."라고 말한다.

   너는 해야 한다는 황금빛으로 번쩍이며 정신의 가는 길을 가로막는다. 그것은 비늘 짐승으로서 그 비늘마다 '너는 해야 한다!'라는 명령이 금빛으로 빛나고 있다. 

   천 년 묵은 가치가 이 비늘들에서 빛난다. 그리하여 모든 용들 가운데서 가장 힘센 용이 말한다. "사물들의 모든 가치, 그것은 나에게서 빛난다."라고.

   "모든 가치는 이미 창조되었다. 모든 창조된 가치, 그것이 바로 나다. 진실로 말하노니 나는 원한다라는 요구는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된다!" 용은 이렇게 말한다. 

   형제들이여, 정신에 있어서 사자는 무엇 때문에 필요한가? 왜 무거운 짐을 견디는 짐승으로 만족하지 못하는가? 체념과 외경심의 짐승으로 말이다.

   새로운 가치의 창조. 이것은 사자도 아직 이루지 못하는 일이다. 그러나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자유의 획득. 이것은 사자의 힘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자유를 쟁취하고 의무 앞에서도 신성하게 아니요, 라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형제들이여, 사자가 되어야 한다.

   새로운 가치를 위한 권리를 쟁취하는 것, 이것은 인내심 많고 외경심을 가진 정신에게 주어질 수 있는 가장 놀라운 소득이다. 참으로 그 정신에게 있어 그것은 강탈이며 강탈하는 짐승에게 주어진 일이다.

   정신도 한때 너는 해야 한다를 가장 신성한 것으로서 사랑했다. 하지만 이제 정신은 가장 신성한 것에서도 미혹과 자의를 찾아내야 한다. 그의 사랑으로부터 자유를 강탈해 내려면 말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강탈을 위해 사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말하라, 형제들이여, 사자도 하지 못한 일을 어떻게 아이가 할 수 있단 말인가? 강탈하는 사자가 이제는 왜 아이가 되어야만 하는가?

   아이는 순진무구함이며 망각이고, 새로운 출발, 놀이, 스스로 도는 수레바퀴, 최초의 움직임이며, 성스러운 긍정이 아닌가.

   그렇다. 창조라는 유희를 위해서는, 형제들이여, 성스러운 긍정이 필요하다. 이제 정신은 자신의 의지를 원하고 세계를 상실한 자는 이제 자신의 세계를 되찾는다. 

   나는 그대들에게 세 단계 변화에 대해 말했다. 어떻게 하여 정신이 낙타가 되었고, 낙타는 사자가 되었으며, 사자는 아이가 되었는가를.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나는 이제 짐을 이고 지고 사막을 걷는 낙타됨을 거부하고 갓 태어난 사자이다. 레오 레오 레오 밀림의 왕자 레오. 아기 사자 눈망울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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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in : 어구어구 at 2021. 1. 14.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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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저에게는 '인간이 목숨을 부지한다. ' 라는 말의 의미가 지금껏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는 얘기가 될 것 같습니다. 제가 가진 행복이라는 개념과 이 세상 사람들의 행복이라는 개념이 전혀 다를지도 모른다는 불안. 저는 그 불안 때문에 밤이면 밤마다 전전하고 신음하고, 거의 발광할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저는 과연 행복한 걸까요? 저는 어릴 때부터 정말이지 자주 참 행운아다, 라는 말을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저 자신은 언제나 지옥 가운데서 사는 느낌이었고, 오히려 저더러 행복하다고 하는 사람들 쪽이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훨씬 더 안락해 보였습니다.

 

나한테는 재난 덩어리가 열 개 있는데, 그중 한 개라도 이웃 사람이 짊어지게 되면 그것만으로도 그 사람에게는 충분히 치명타가 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한 일도 있습니다.

 

즉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웃 사람들의 괴로움의 성질과 정도라는 것이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실용적인 괴로움, 그저 밥만 먹을 수 있으면 그것으로 해결되는 괴로움. 그러나 그 괴로움이야말로 제일 지독한 고통이며, 제가 지니고 있는 열 개의 재난 따위는 상대도 안 될 만큼 처참한 아비지옥일지도 모릅니다. 그건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치고는 자살도 하지 않고 미치지도 않고 정치를 논하며 절망도 하지 않고 좌절하지도 않고 살기 위한 투쟁을 잘도 계속하고 있다. 괴롭지 않은 게 아닐까? 철저한 이기주의자가 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확신하고 한번도 자기 자신에게 회의를 느낀 적이 없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편하겠지. 하긴 인간이란 전부 다 그런 거고 또 그러면 만점인 게 아닐까. 모르겠다...... 밤에는 푹 자고 아침에는 상쾌할까? 어떤 꿈을 꿀까? 길을 걸으면서 무얼 생각할까? 돈? 설마 그것만은 아니겠지. 인간은 먹기 위해 산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지만 돈 때문에 산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어. 아닐 거야. 그러나 어쩌면...... 아니, 그것도 알 수 없지......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익살이었습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사람이라는 것이 알 수가 없어졌고, 저 혼자 별난 놈인 것 같은 불안과 공포가 엄습할 뿐이었습니다. 저는 이웃 사람하고 거의 대화를 못 나눕니다. 무엇을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몰랐던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저의 최후의 구애였습니다. 저는 인간을 극도로 두려워하면서도 아무래도 인간을 단념할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익살이라는 가는 실로 간신히 인간과 연결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겉으로는 늘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필사적인, 그야말로 천 번에 한 번밖에 안 되는 기회를 잡아야 하는 위기일발의 진땀 나는 서비스였습니다.

 


또 저는 가족한테 꾸중을 듣고 말대꾸한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그 사소한 꾸중은 저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아 저를 미칠 지경에 이르게 했기 때문에 말대꾸는커녕 그 꾸중이야말로 말하자면 마세일계, 즉 고대로부터 단일 계통을 이어온 일본인의 '진리'임에 틀림없다, 나한테는 그 진리를 행할 능력이 없으니까 더 이상 인간과 더불어 살 수 없는게 아닐까, 라고 확신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말싸움도 자기변명도 하지 못했습니다. 남이 저에게 욕을 하면 그래 정말이야, 내가 엄청 잘못 생각하고 있었어, 그렇게 생각되어서 언제나 그 공격을 잠자코 받아들이고 속으로는 미칠 듯한 공포를 느꼈던 것입니다. 

 

그야 누구든 남이 비난을 퍼붓거나 화를 낼 때 기분이 좋을 사람은 없겠습니다만, 저는 화를 내는 인간의 얼굴에서 사자보다도, 악어보다도, 용보다도 더 끔찍한 동물의 본성을 보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평상시에는 본성을 숨기고 있다가 어떤 순간에, 예컨대 소가 풀밭에서 느긋하게 잠자고 있다가 갑자기 꼬리로 배에 앉은 쇠등에를 탁 쳐서 죽이듯이, 갑자기 무시무시한 정체를 노여움이라는 형태로 드러내는 모습을 보면 저는 언제나 머리털이 곤두서는 듯한 공포를 느꼈습니다. 이 본성 또한 인간이 되는 데 필요한 자격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저 자신에 대한 절망감에 휩싸이곤 했습니다.

 

늘 인간에 대한 공포에 떨고 전율하고 또 인간으로서의 제 언동에 전혀 자신을 갖지 못하고 자신의 고뇌는 가슴속 깊은 곳에 있는 작은 상자에 담아두고 그 우울함과 긴장감을 숨기고 또 숨긴 채 그저 천진난만한 낙천가인 척 가장하면서, 저는 익살스럽고 약간은 별난 아이로 점차 완성되어 갔습니다.

 

뭐든 상관없으니까 웃게만 만들면 된다. 그러면 인간들은 그들이 말하는 소위 '삶' 이라는 것 밖에 내가 있어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을지도 몰라. 어쨌든 인간들의 눈에 거슬려서는 안 돼. 나는 무야. 바람이야. 텅 비었어. 그런 생각만이 강해져서 저는 익살로 가족을 웃겼고, 또 가족보다 더 불가사의하고 무시무시한 머슴이랑 하녀들한테까지도 필사적으로 익살 서비스를 했던 것입니다. 

 


뭐가 갖고 싶지? 하고 누가 물으면 저는 그 순간 갖고 싶은 게 아무것도 없어져버리곤 했습니다. 아무래도 상관없어. 어차피 나를 즐겁게 해줄 것 따위는 없어. 그런 생각이 꿈틀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남이 준 것은 아무리 제 취향에 맞지 않아도 거절도 못했습니다. 싫은 것을 싫다고 하지도 못하고, 또 좋아하는 것도 쭈뼛쭈뼛 훔치듯이 전혀 즐기지 못하고, 그러고는 표현할 길 없는 공포에 몸부림쳤습니다. 즉 저에게는 양자택일하는 능력조차도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뒷날 저의 소위 '부끄럼 많은 생애'의 큰 원인이 되기도 한 성격의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존경받는다는 개념 또한 저를 몹시 두렵게 했습니다. 거의 완벽하게 사람들을 속이다가 전지전능한 어떤 사람한테 간파당하여 산산조각이 나고 죽기보다 더한 창피를 당하게 되는 것이 '존경받는다'는 상태에 대한 제 정의였습니다. 인간을 속여서 '존경받는다'해도 누군가 한 사람은 알고 있다. 그리고 인간들도 그 사람한테서 듣고 차차 속은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을 때, 그때 인간들의 노여움이며 복수는 정말이지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상상만 해도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이었습니다.

 


틀림없이 편파적일 게 뻔해. 필경 인간에게 호소하는 것은 헛일이다. 나는 역시 아무것도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참고, 그리고 익살꾼 노릇을 계속해 갈 수밖에 없다는 마음이 되었습니다.

 

뭐야, 인간에 대한 불신을 말하고 있는 거야? 흥, 네가 언제부터 기독교인이 됐는데? 하고 조소할 사람도 혹시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불신이 반드시 곧장 종교의 길로 통하는 것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실 그 조소하는 사람을 포함해서 인간은, 여호와건 뭐건 생각조차 안 하고 태연하게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서로 속이면서, 게다가 이상하게도 전혀 상처를 입지도 않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 정말이지 산뜻하고 깨끗하고 밝고 명랑한 불신이 인간의 삶에는 충만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그렇지만 저는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 따위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저도 익살로 아침부터 밤까지 인간들을 속이고 있으니까요. 저느 바른생활 교과서에 나오는 정의니 뭐니 하는 도덕 따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저한테는 서로 속이면서 살아가는, 혹은 살아갈 자신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이야말로 난해한 것입니다. 인간은 끝내 저한테 그 요령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그것만 터득했더라면 제가 인간을 이렇게 두려워하면서 필사적인 서비스 같은 것은 안 해도 됐을 텐데 말입니다. 인간의 삶과 대립되어 밤이면 밤마다 지옥 같은 괴로움을 맛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말입니다. 

 

- 다자이 오사무, '인간 실격'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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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in : 어구어구 at 2020. 11. 6. 0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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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이 빛나는 점을 보라.

그것은 바로 여기, 우리 집, 우리 자신인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 아는 사람, 소문으로 들었던 사람, 그 모든 사람은 그 위에 있거나 또는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기쁨과 슬픔, 숭상되는 수천의 종교, 이데올로기, 경제이론, 사냥꾼과 약탈자, 영웅과 겁쟁이, 문명의 창조자와 파괴자, 왕과 농민, 서로 사랑하는 남녀, 어머니와 아버지, 앞날이 촉망되는 아이들, 발명가와 개척자, 윤리 도덕의 교사들, 부패한 정치가들, 수퍼스타, 초인적 지도자, 성자와 죄인 등 인류의 역사에서 그 모든 것의 총합이 여기에, 이 햇빛 속에 떠도는 먼지와 같은 작은 천체에 살았던 것이다. 

     지구는 광대한 우주의 무대 속에서 하나의 극히 작은 무대에 지나지 않는다. 이 조그만 점의 한 구석의 일시적 지배자가 되려고 장군이나 황제들이 흐르게 해던 유혈의 강을 생각해 보라. 또 이 점의 어느 한 구석의 주민들이 거의 구별할 수 없는 다른 한 구석의 주민들에게 자행했던 무수한 잔인한 행위들, 그들은 얼마나 빈번하게 오해를 했고, 서로 죽이려고 얼마나 날뛰고, 얼마나 지독하게 서로 미워했던가 생각해 보라. 

     우리의 거만함, 스스로의 중요성에 대한 과신, 우리가 우주에서 어떤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망상은 이 엷은 빛나는 점의 모습에서 도전을 받게 되었다. 우리 행성은 우주의 어둠에 크게 둘러싸인 외로운 티끌 하나에 불과하다. 이 광막한 우주공간 속에서 우리의 미천함으로부터 우리를 구출하는 데 외부에서 도움의 손길이 뻗어올 징조는 하나도 없다. 

     지구는 현재까지 생물을 품은 유일한 천체로 알려져 있다. 우리 인류가 이주할 곳 - 적어도 가까운 장래에 - 이라고는 달리 없다. 방문은 가능하지만 정착은 아직 불가능하다. 좋건 나쁘건 현재로서는 지구만이 우리 삶의 터전인 것이다. 

     천문학은 겸손과 인격수양의 학문이라고 말해져 왔다. 인간이 가진 자부심의 어리석음을 알려주는 데 우리의 조그만 천체를 멀리서 찍은 이 사진 이상 가는 것은 없다. 사진은 우리가 서로 더 친절하게 대하고 우리가 아는 유일한 고향인 이 창백한 푸른 점을 보존하고 소중히 가꿀 우리의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 칼 세이건, "창백한 푸른 점"에서.

 

++++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외계 생명체'라는 것이 공상 과학에서나 나오는 허무맹랑한 소재라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가 태양계의, 더 나아가 우주의 중심이며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무대라고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의 과학으로 밝혀진 바에 의하면 지구는 태양계 내에서도 창백한 푸른 점에 불과하며, 지구가 속해 있는 태양계 또한 존나게 큰, 아니 지금 이 순간조차 무한히 팽창하고 있는 우주의 변두리에 짜져 있을 뿐이다. 이렇게 헤아리기 어려울만큼 광대한 우주를 무대로 지구 외의 다른 행성에서 우리와 같은, 하지만 조금은 결이 다른 '살아있는 것'이 존재할 가능성을 확률적으로 생각해보면 지구가 생명체를 품은 우주 유일의 행성이며 그곳에서 사는 우리 인간이 우주 유일의 생명체일 것이라는 가설이야말로 허무맹랑한 이야기다. 하지만 우리에게 허용된 우주를 항해하는 기술이 (돈이) 충분하지 못해 현재로서는 이 지구에 사는 우리 외의 생명체는 발견하지 못했다. 우리는 그렇게 희소하고 소중한 존재다.

     요즘 사람들은 그저 모든 것에 화가 머리 끝까지 나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이들은 자기 자신 안에 갇혀서 늘 분주하지만 한치 앞도 성장하지 못한 채, 타인을 비난하고 어떻게든 끌어내리며 스스로의 초조함을 달래는 것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는 것 같다. 먼지같이 작은 창백한 푸른 점에서 먼지같이 왔다갈 찰나의 인생을 왜 그렇게 머리 박터지게 아웅다웅 살아갈 수 밖에 없는지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드넓은 우주에서도 이 태양계, 그 속에서도 이 창백한 푸른 점에서 우연히도 엇비슷한 시공간에 태어나 같이 숨쉬며 살아간다는 것. 이건 감사할 일을 넘어 경이로운 일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조금만 더 친절해진다면 좋을텐데. 이럴 때 미약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나 스스로가 타인에게 조금 더 친절해지자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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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in : 어구어구 at 2020. 10. 17. 0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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