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자꾸 초등학교 때 찰흙 놀이하던 생각이 난다. 

사실 수업의 일환이었으므로 '놀이'라고 하기엔 좀 그렇지만 아무튼.

난 미술 수업을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그 소재가 찰흙일 때는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처음 만지는 찰흙은 꽤 딱딱하고 이상한 냄새도 나는 것 같고 만져보면 거친 모래들도 느껴졌다.

그 조악한 플라스틱 찰흙 받침 같은 거도 싫었다. 그닥 쓸데없는 플라스틱 조각칼 같은 거도 달려있는 게 어쭙잖았다.

그래서 찰흙으로 뭘 만들라고 하면 "이걸로 뭘 만들라고 이놈들아 ㅎ ㅏ 대한민국에서 초딩질하기 빡세네" 이런 생각이나 똥이나 만들자는 생각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나저나 그 시절 찰흙을 요즘도 팔까? 이렇게 말하니 내가 영락없는 틀딱인 게 느껴져서 조금 슬프다.

그건 어떻게 제조되는 것이었을까? 어디 축축한 흙 퍼다가 네모로 잘라서 포장하나 진용진님 도와주세여!! 

 

아무튼 내가 하려던 이야기는 사실 '잘 가다듬는 것'에 대한 것이다. 

어떤 애가 수업 시간에 찰흙으로 결이 정말 곱고 예쁜 구형의 사과를 빚어낸 것을 보고,

"아니 그 비루한 찰흙 너나 나나 같은 것을 썼을텐데 어떻게 저런 걸 만들었지? 나는 그냥 똥만드는 기계인데?"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걔랑 그닥 친하지도 않았고 내성적이었음에도 용기를 내서 어떻게 하는 거냐고 물어봤다.

그러니까 걔가 하는 말이, 

 

"이걸 공모양으로 만들어서, 아주 오랫동안 손으로 만져주면 돼. "

 

왜인지 잘 모르겠지만 아직도 그 아이의 이 대답이 종종 머릿속을 맴돈다.

요즘 나는 나 자신을, 내 하루를 가다듬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오랫동안 계속해서 가다듬는 것. 

이게 별 거 아닌 거 같은데 어느 하나도 쉽지 않다. 

 혜선아 잘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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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in : 두랄루민 at 2020. 10. 8.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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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심 

내 목소리, 귀로는 듣지 못해도,

마음속으론 쟁쟁히 울릴 거예요.

이리저리 모습을 바꾸며

나는 무서운 힘을 발휘한답니다.

오솔길에서도 파도 위에서도

영원히 불안케 하는 길동무로서,

결코 찾지 않았는데도 늘 나타나고

저주도 받지만 아첨도 받는답니다.

그런데 당신은 근심이란 걸 모르시나요?

 

파우스트

나는 오로지 이 세상을 줄달음쳐 왔다.

쾌락이라면 모조리 그 머리채를 움켜잡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놓아 버렸으며,

내게서 빠져나가는 것은 내버려 두었다.

나는 오로지 갈망하고 오로지 성취해 왔다.

또한 소망을 품고 그토록 힘차게 

평생을 질주해 왔다. 처음엔 원대하고 힘에 넘쳤지만,

지금은 현명하고 신중하게 행동한다.

이 지상의 일은 충분히 알고 있지만,

천상을 향한 전망은 사라져 버렸다.

저 하늘을 향해 눈을 깜박거리는 자,

구름 위에 자신과 같은 존재가 있다고 꿈꾸는 자는 멍청이로다!

바로 여기에 굳건히 서서 주위를 둘러볼 일이다.

유능한 자에게 이 세상은 침묵하지 않는 법.

무엇 때문에 영원 속을 헤매 다닌단 말인가.

인식한 것은 모두 손에 넣을 수 있으니,

이렇게 지상의 나날을 보내도록 하라.

유령들이 날뛴다 해도 내 갈 길을 가는 거다.

어떤 순간에도 만족을 모르는 그자!

그가 당당히 나아가는 길엔 고통도 행복도 함께 있으리라!

 

근심

누구든 나한테 한번 붙잡히면

그자에겐 온 세상이 소용없게 되지요.

영원한 암흑이 내려와 

태양은 뜨지도 지지도 않아요.

바깥의 감각은 멀쩡해 보이더라도

안으로는 이미 어둠이 깃들어 있지요.

온갖 보화들 중 그 어느 것도 

제 것으로 소유할 수 없게 됩니다.

행복이든 불행이든 시름으로 변하여,

풍요 속에서 굶주릴 뿐이지요. 

즐거운 일이든 괴로운 일이든 

다음 날로 미루며

하염없이 앞날을 기다리기만 하니

결코 아무 일도 끝맺지 못해요.

 

파우스트

닥쳐라! 그런다고 해서 난 꿈쩍도 않는다!

그따위 허튼소리는 듣고 싶지도 않다.

썩 꺼져라! 그런 고약한 푸념을 계속 늘어놓으면,

제 아무리 영리한 자도 헷갈리겠다.

 

근심

가야 하나 와야 하나?

그런 자는 결단을 못내려요.

훤히 뚫린 길 한복판에서

더듬거리며 이리 반 발짝 저리 반 발짝.

점점 더 깊이 혼란에 빠져

모든 것을 비뚤게 보게 되지요.

자신에게나 남에게나 성가신 존재가 되어 

숨을 헐떡이다 숨이 막혔다 하니

질식까진 안 해도 생기가 없고,

절망하지도 몰두하지도 못하지.

줄곧 이리 뒹굴 저리 뒹굴,

내버려 두자니 괴롭고, 하자니 싫은 거지요.

때로는 해방이요, 때로는 억압이라

몽롱한 잠에 빠져 기운도 못 차리고 

꼼짝없이 제자리에 묶여

지옥에 갈 준비나 하지요.

 

파우스트

이 빌어먹을 유령들! 너희들은 그런 식으로 

천 번 만 번이고 인간을 괴롭히는구나.

무사태평한 날까지도 너희들은 

그물처럼 얽힌 고통의 불쾌한 혼란으로 바꿔 버린다.

악령에게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걸 나도 알아.

정령과 맺은 엄격한 유대도 풀 수 없느니라.

하지만 아아, 근심아, 슬며시 기어드는 너의 커다란 힘을,

나는 결코 인정하지 않겠다.

 

근심

내가 저주의 말을 남기고 재빨리

당신을 떠날 때, 비로소 나의 위력을 알 거예요!

인간이란 한평생 앞을 보지 못하니,

파우스트여, 당신도 이제는 장님이 되세요!

(파우스트에게 입김을 내뿜는다.)

 

파우스트 (눈이 먼다.)

밤이 점점 더 깊어 가는 것 같은데,

마음속에선 오히려 밝은 빛이 환하게 빛나는구나.

내가 생각했던 것을 서둘러 완성해야겠다. 

주인의 말씀, 그것만이 위력이 있는 것이니,

여봐라, 하인들아! 모두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거라!

내가 대담하게 계획했던 일을 멋지게 이루어다오.

연장을 잡아라, 삽과 괭이를 들어라!

정해진 목표는 당장에 해치워야 한다.

엄격하게 규칙을 지키고, 부지런히 일하면,

최고의 보수를 받을 것이다. 

이 위대한 사업을 완성하는 데는 

천 개의 손을 부리는 하나의 정신으로 족하리라. 

 

- 요한 볼프강 폴 괴테  "파우스트" 중.

 

****

뚜렷하게 정해진 목표를 갖고 존나게 노력해도 인간은 결국 근심에 둘러쌓일 수밖에 없는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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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in : 어구어구 at 2020. 5. 17.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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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에 살게 된지 이제 꽤 오래되었다. 그동안 여기 살면서 '이건 확실히 사는데 제법 도움이 된다' 생각한 게 몇 가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수상 혹은 위험해보이지 않을 것'. 동양 여자에 대한 편견이 있어 왠만해선 그렇게 봐주지 않기도 하지만 개개인을 중시하고 언제 어디서 빵야 빵야 시밤쾅할지 모르는 곳이다보니 분명 모두에게 보이지 않는 가드같은 것이 존재하고 자연스레 나도 지니게 되었다.  

     여태 운전 버진인 게으른 나는 다른 도시에서나 공항 왕복을 해야할 때 우버를 애용하는데 나의 가드는 그 때 많이 올라가는 것 같다. 워낙 범죄 관련 다큐나 창작물을 좋아해서인지 '남이 모는 차' 라는 배경에 아주 자연스럽게 신경이 곤두서는 것이다. 오늘은 밤 비행기로 주말 동안 잠시 시카고에 갈 예정이라 공항에 가려고 우버를 불렀는데 기사님의 첫인상이 범상치 않았다. 우리 동네에선 흔치 않은, 바로 내가 티비에서나 가끔 보는 금목걸이 쩔렁 쩔렁 뻔쩍 뻔쩍 형님 샤쓰를 걸친 그런 분이었다. 보통 트렁크에 넣을 짐이 있으면 기사님들이 트렁크를 열어주고 짐도 대신 들어서 넣어주시는데 이 놈 아니 이 분은 운전 좌석에 앉아 고개 하나 내보이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쿨한 첫만남에 나는 아마 그 때부터 제법 긴장을 했을 것이다. 뭐 짐 같은 것은 아무렴 나 스스로 얼마든지 번쩍 번쩍 들 수 있기 때문에 알아서 트렁크에 짐을 잘 넣고 조심스럽게 뒷좌석에 앉았다. 우리 동네는 이제 제법 추운데 창문을 앞 뒤로 열어 놓고 달리는 것이, 자유로운 영혼 혹은 흡연자의 습성 같기도 했다. 예전엔 나도 한동안 그렇게 살았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일단 안전 벨트부터 채웠다. 공항 가는 길은 차로 25-30분 정도 걸린다. 나는 어릴 때부터 미용실에 가든 남의 차를 타든 모르는 사람과는 대화없이 조용히 있는 것을 선호하는 쭈구리라 우리는 그렇게 나로 인해 반강제적으로 침묵 속에 함께 차를 타고 달리고 있었다. 정작 운전을 하는 그는 그것이 썩 편치 않았는지 아니면 오늘따라 그냥 좀 심란한 일이 있었는지 블루투스로 노래를 엄청난 볼륨으로 틀기도 하고 좀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리 저리 채널을 돌리기도 했다. 아 이게 혹시 말로만 듣던 흑형의 초조한 스웩 같은 건가 하는 생각도 들고 나는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그저 한동안 창 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공항에 가까워오자 나는 항공사를 알려줄 요량으로 그 쪽을 바라보았는데 아니 이 놈이 아니 이 사람이 운전 중에 앞은 안 보고 폰만 보고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한참을! 아니 대체 얼마나 저러고 운전을 해온 것인가! 저정도의 운전 중 딴짓은 우버에 대충 귀띔만 해줘도 바로 전액 환불과 사과 메일을 받기 마련이라 공항에 도착하는대로 항의 메일을 써주는 것이 서로에게 좋겠군 이라고 생각하던 중 그가 갑자기 깜빡이 비슷한 것도 없이 내게 말을 걸었다.

 

"너.. 셀린 디온 알아?"

- ".................?..으응?"

 

난 그 때야 그 사람의 얼굴을 처음으로 제대로 보았다. 나야말로 내멋대로 그가 험상궂게 생겼을 거라고 생각했었는지 내 생각보다 훨씬 어리고 순진해보이는 얼굴로 그는 미소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이거 셀린 디온 노랜데.. 셀린 디온 알아?"

- "응 알지 타이타닉아님? ㅇㅇ"

 

"응응 그 셀린 디온이 이번 주 일요일에 콜럼버스에 공연와"

- "아.. 그렇구나. 너도 갈거야?"

 

"(만개한 미소) 응! 꼭 가야지.이 노래 셀린 디온이 불어로 부른 건데 내 모국어가 불어거든?!" 

 

-하면서 그는 불어로 졸라 자유롭게 셀린 디온의 노래를 크게 따라 부르기 시작했고 그는 무척 행복해보였다. 그 순간 나는 항의 메일을 쓰는 건 그만두자고 생각했다. 그는 그저 며칠 뒤 자기가 좋아하는 셀린 디온을 직접 보고 모국어로 노래를 따라부를 생각에 조금 들떴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동안 쑥쑥 올라가있던 내 가드가 주르륵 힘없이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의 마중을 받으며 공항에 잘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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