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자신의 내면에 있는 새가 죽은 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자기가 그 새의 죽음을 느끼지 않았단 말인가? 그렇다, 그 새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있는 어떤 다른 것이 죽은 것이다. 죽은 것은 자기가 옛날 언젠가 작열하던 태양 아래에서 참회의 생활을 하던 시절 사멸시켜 버리고자 하였던 바로 그것이 아닐까? 죽은 것은 바로 자신의 자아가 아닐까? 자기가 그 숱한 세월 동안 투쟁을 벌여왔던 대상, 언제나 거듭하여 자기를 이겼던 것, 매번 사멸하고 나서도 매번 또다시 살아나, 기쁨을 금지하고, 두려움을 느끼는 그것, 바로 자신의 그 작고 불안한, 자만에 찬 자아가 죽은 것이 아닐까? 이곳 숲속에 자리잡고 있는 사랑스런 강가에서 오늘 마침내 죽음을 맞이하였던 것이 바로 그것이 아닐까? 자기가 지금 마치 어린아이처럼, 이토록 확신에 넘쳐서, 이토록 두려움 없이, 이토록 기쁨에 가득 차 있는 것은 바로 그 자아의 죽음 때문이 아닐까?

 

     이제 싯다르타는, 자기가 바라문으로서, 참회자로서 이 자아와 투쟁을 하였지만 무엇 때문에 그 싸움이 헛수고가 되고 말았던가 하는 이유도 어렴풋이나마 예감할 수 있었다. 너무 많은 지식이, 너무 많은 성스러운 구절이, 너무 많은 제사의 규칙들이, 너무 많은 단식이, 너무 많은 행위와 노력이 자기를 방해하였던 것이다. 자기는 자만심으로 가득차 있었으니, 언제나 가장 현명한 자였고, 언제나 최고의 열성파였으며, 언제나 학자이자 사상가였으며, 언제나 사제 아니면 현인이었다. 이런 사제 기질 속으로, 이런 교만한 마음속으로, 이런 정신적 성향 속으로 자기의 자아가 살며시 파고 들어와서는 거기에서 단단히 자리를 잡고 앉아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는 동안, 자기는 단식과 참회로써 그 자아를 죽이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자기는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또한 어떤 스승도 어차피 자기를 구제해 줄 수는 없을 것이라고 하였던 그 내밀한 음성이 옳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때문에 자기는 세상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으며, 쾌락에 권력에, 여자와 돈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으며, 장사꾼, 주사위 노름꾼, 술꾼, 탐욕스런 자가 될 수밖에 없었으며, 그러다가 결국 자기의 내면에 있던 사제 의식과 사문 의식이 죽어 없어지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그 때문에 자기는 계속하여 그 가증스런 세월을 견뎌나갈 수밖에 없었으며, 그 구토증을, 그 공허감을, 황량하고 길을 잃고 타락한 인생의 그 무의미함을 견뎌낼 수밖에 없었으며, 그러다가 마침내는 그러한 삶의 종말에 이르게 되었으며, 쓰디쓴 절망감에 빠지게 되었으며, 탕아 싯다르타, 탐욕자 싯다르타도 죽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 싯다르타는 죽고 없었으며, 새로운 싯다르타가 잠에서 깨어나 있었다. 이 새로운 싯다르타 역시 아마도 늙게 될 터이고, 이 새로운 싯다르타 역시 아마도 언젠가는 필연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을 터이니, 싯다르타란 덧없는 존재이며, 형상을 지닌 것은 모조리 덧없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자기는, 이 새로운 싯다르타는 젊고 기쁨에 가득 찬 어린아이이다. 

 

     그는 이러한 생각들을 하고 있었으며, 미소를 지으면서 자기 위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으며, 벌이 윙윙거리는 소리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귀기울여 들었다. 명랑한 기분으로 그는 흘러가는 강물 속을 들여다보았는데, 강물이 그토록 자기 마음에 든 적이 일찍이 한 번도 없었으며, 흘러가는 강물 소리와 강물이 들려주는 비유가 자기의 귀에 그토록 강렬하고 아름답게 들렸던 적은 일찍이 한 번도 없었다. 마치 강물이 자기에게 들려줄 어떤 특별한 이야기가 있기라도 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자기가 아직 알지 못하는 그 특별한 이야기가 자기를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 강물 속에 싯다르타는 빠져 죽으려고 하였었다. 피곤에 지치고 절망에 빠진 그 옛 싯다르타는 이 강물 속에 오늘 빠져 죽었다. 그러나 새로운 싯다르타는 이 흘러가는 강물에 깊은 사랑을 느꼈으며, 그 강을 다시 곧바로 떠나지는 않겠다고 결심하였다. 

..

강물은 어디에서나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강의 원천에서나, 강 어귀에서나, 폭포에서나, 나루터에서나, 시냇물의 여울에서나, 바다에서나, 산에서나, 도처에서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강에는 현재만이 있을 뿐, 과거라는 그림자도, 미래라는 그림자도 없다. 

..

"그러자 나의 인생도 한 줄기 강물이었습니다. 소년 싯다르타는 장년 싯다르타와 노년 싯다르타로부터 단지 그림자에 의하여 분리되어 있을 뿐, 진짜 현실에 의하여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싯다르타의 전생들도 결코 과거의 일이 아니었으며, 싯다르타의 죽음이나 범천에로의 회귀도 결코 미래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무것도 없었으며,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은 현존하는 것이며, 모든 것은 본질과 현재를 지니고 있습니다. "

..

싯다르타는 무아지경에 빠져 황홀한 상태로 말하였으니, 이러한 깨달음이 그를 그토록 기쁘게 하였던 것이다. 아, 일체의 번뇌의 근원이 시간 아니고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자신을 괴롭히는 것도, 두려워하는 것도 그 근원은 모두 시간 아니고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그렇다면 인간이 그 시간이라는 것을 극복하는 즉시, 인간이 그 시간이라는 것을 없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즉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힘겨운 일과 모든 적대감이 제거되고 극복되는 것이 아닌가? 

..

"이 세계는 불완전한 것도 아니며, 완성을 향하여 서서히 나아가는 도중에 있는 것도 아니네. 이 세계는 매순간순간 완성된 상태에 있으며, 온갖 죄업은 이미 그 자체 내에 자비를 지니고 있으며, 작은 어린애들은 모두 자기 내면에 이미 백발의 노인을 지니고 있으며, 젖먹이도 모두 자기 내면에 죽음을 지니고 있으며, 죽어가는 사람도 모두 자기 내면에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아무도 다른 사람에 대하여 그 사람이 스스로의 인생 행로에서 얼마만큼 나아간 경지에 있는가를 감히 이러쿵저러쿵 말할 수는 없네. 도둑과 주사위 노름꾼의 내면에 부처가 깃들여 있고, 바라문의 내면에 도둑이 도사리고 있으니 말이야. 깊은 명상에 잠긴 상태에서는 시간을 지양할 수가 있으며, 과거에 존재하였던, 현재 존재하고 있는, 그리고 미래에 존재할 모든 생명을 동시적인 것으로 볼 수가 있어. 그러면 모든 것이 선하고, 모든 것이 완전하고, 모든 것이 바라문이야. 따라서 나에게는 존재하고 있는 것은 선하게 보이며, 나에게는 죽음이나 삶이 다 같게 보이며, 죄악이나 신성함이 똑같이, 지혜로움이나 어리석음이 똑같이 보여. 세상만사의 이치가 틀림없이 그러하며, 세상만사는 오로지 나의 동의, 오로지 나의 흔쾌한 응낙, 그리고 나의 선선한 양해만을 필요로 할 뿐이네. 이것은 나에게는 좋은 일이지. 나를 후원해 줄 뿐,  나에게 결코 해를 입힐 수는 없으니 말이야. 나는 나 자신의 육신의 경험과 나 자신의 영혼의 경험을 통하여 이 세상을 혐오하는 일을 그만두는 법을 배우기 위하여, 이 세상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하여, 이 세상을 이제 더 이상 내가 소망하는 그 어떤 세상, 내가 상상하고 있는 그 어떤 세상, 내가 머릿속으로 생각해 낸 일종의 완벽한 상태와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놔둔 채 그 세상 자체를 사랑하기 위하여 그리고 기꺼이 그 세상의 일원이 되기 위하여, 내가 죄악을 매우 필요로 하였다는 것을, 내가 관능적 쾌락, 재물에 대한 욕심, 허영심을 필요로 하였다는 것을 그리고 가장 수치스러운 절망 상태도 필요로 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네. "

 

-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중.

 

*****

     헤세의 싯다르타를 다시 읽었다 (네 바로 그 허세떨기 딱 좋은 허르만 허세). 최근 끊이지 않는 깊은 번뇌에 (더욱) 휩싸여 어쩐지 불교 경전이나 성경책 비슷한 것을 읽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전에 읽을 때보다 훨씬 피부에 와닿은 부분들이 있어 여기에 발췌해 적어본다. 가만히 미친놈처럼 정신수양을 잘 하는가 싶더니 급브레이크 밟고 속세의 환락과 더러움 속에 푹 찌들어 살다가 간신히 정신차리고 빠져나온 싯다르타가, 자기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역겨웠던 나머지 현타 빡세게 와서 그만 강물에 투신 자살하려다가 헐? 내 인생은 강물?! 하고 급깨달음을 얻는 부분이다.

     개인적으로 내가 하는 일과 나 자신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많이 드는 요즘이다. 내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인생을 어찌저찌 살아보니 일이라는 것은 내가 열심히 하든 말든 최선을 존나게 다 하든 말든 상관없이 잘 안 풀릴 때도 있는 것 같다. 그 때마다 그걸 내 자아에 깊게 투영해서 괴로워해봤자 나아질 것이 없다는 것이다. 좋든 싫든 의도했든 안했든 어차피 일어난 일들에, 또 앞으로 일어날지 모르는 일들에, 그저 번뇌에 일일이 휩쓸려봤자 보탬될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잊지 말자고 자주 되뇌인다. 그럼에도 나로서는 자아와 시간의 속박으로부터 빠져나온다는 것이 참으로 쉽지 않다. 차라리 맹목적인 명상이나 극단적인 단식을 수행하는 것이 쉬울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듯 나는 범인이기에 자아로부터의 구제, 열반의 경지에 닿는 것은 꿈도 꾸지 않고 더 나아가 세상의 이치따위 깨닫지 못해도 좋다. 그저 오늘 하루 감사하는 마음으로 충실히 살아갈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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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이스.

"내가 이런 음악을 좋아하는 건." 언젠가 엠이 말했다. "요컨대 스페이스의 문제야."

"스페이스의 문제?"

"그러니까, 이런 음악을 듣고 있으면 내가 아무것도 없는 드넓은 공간에 있는 기분이 들거든. 그곳은 정말로 넓고, 칸막이 같은 것도 없어. 벽도 없고 천장도 없어.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아무 생각 안해도 되고, 아무 말 안 해도 되고, 아무 일 안 해도 돼. 단지 그곳에 있기만 하면 돼. 그냥 눈을 감고 스트링스의 아름다운 음악 소리에 몸을 맡기면 돼. 두통도 없고 수족냉증도 없고 생리도 배란기도 없어.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한결같이 아름답고 평안하고 막힘이 없어. 그 이상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아."

 

-무라카미 하루키, 여자없는 남자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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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나 자신을 오직 하나의 인간 존재로만 본다. 말하자면, 사고하고 감정을 느끼는 존재로만 본다는 말이다. 나는 타인은 물론이고 나 자신에게서도 한 발 물러나 초연할 수 있는 어떤 이중성을 느낀다. 또한 내 경험이 얼마나 강렬하든, 그 경험에 참여하는 나와 그것을 비판하는 내가 있음을 잘 안다. 비판하는 나는 그저 관객의 입장으로 전혀 경험을 공유하지 않은 채, 단지 메모만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나는 '나'라기보다는 차라리 '너'에 가깝다. 비극이 될지도 모를 인생극이 끝나면, 관객은 제 갈 길로 가버린다. 관객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 인생극은 한 편의 허구이며 상상력으로 만들어 낸 작품일 뿐이다. 이러한 이중성이 우리를 종종 하찮은 이웃이나 친구로 만들어 버리는 것일 게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홀로 보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교제는 아무리 좋은 사람들과 어울린다고 해도 사람을 곧 지치고 산만하게 만들어 버린다. 나는 혼자 있는 게 좋다. 고독만큼 함께하기 좋은 벗을 아직은 만나 보지 못했다. 대체로 우리는 방 안에 홀로 머물 때보다 밖에 나가 사람들과 어울릴 때 더 외로움을 느낀다. 사색하거나 일하는 사람은 늘 혼자다. 그런 사람을 굳이 끌어내지 말자. 고독의 정도는 인간과 인간 사이를 메우고 있는 공간의 거리로는 측정할 수 없다. 케임브리지 대학이라는 그 북새통 속에서도 정말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은 사막에서 수도하는 이슬람의 탁발승만큼이나 고독하다. 

 

     농부는 종일 홀로 들판에서 김을 매거나 숲에서 나무를 베면서도 일에 몰두하는 덕에 전혀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밤에 집으로 돌아가면, 생각이 많아지는 탓에 기분 전환 삼아 '사람들을 만나러' 밖으로 나가야만 한다. 그것을 종일 혼자 있었던 것에 대한 보상이라 생각한다. 그리면서 농부는 어떻게 학생은 밤낮 가리지 않고 집 안에 홀로 앉아 있으면서도 권태를 느끼기는커녕 '우울증'에도 걸리지 않는지 궁금해한다. 그는 학생이 집 안에 있더라도 여전히 농부처럼 '그의' 밭에서 일을 하고, '그의' 나무를 베어 내며, 그런 다음에는 농부와 마찬가지로 휴식과 어울릴 사람들을 찾아 나서지만, 훨씬 압축된 형태로 추구할 뿐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인간의 교제는 일반적으로 너무 천박하다. 다들 너무 자주 만나는 탓에, 서로에게서 새로운 가치를 얻을 여유가 없다. 하루 세 끼 밥 먹을 때 만나서 우리 자신이라는 곰팡이 핀 오래된 치즈를 서로에게 권한다. 이렇게 자주 만나도 그럭저럭 참을 만해서 서로에게 전쟁을 선포하는 일이 없도록 하려면, 우리는 예의와 정중함이라 불리는 일련의 규칙을 세워 놓아야 한다. 우체국에서 만났다 싶으면, 친목회에서도 만나고, 또 밤마다 화롯가에서도 만나지 않는가. 그러다 보니 관계가 너무 돈독한 탓에 서로의 앞길을 막아서기도 하고, 서로의 발에 걸려 넘어지기도 한다. 장담컨대, 지금보다 조금 덜 만나도 중요하고 진심 어린 대화를 나누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을 터다. 공장에서 일하는 저 소녀들의 경우를 보자. 그들은 꿈속에서조차 결코 외로운 법이 없다. 내가 사는 곳처럼 1 제곱마일마다 한 사람이 살아간다면 좋지 않겠는가. 인간의 가치는 손으로 만져 볼 수 있는 피부에 있지 않다. 

 

     나는 숲에서 길을 잃어 굶주림과 탈진으로 나무 밑에서 죽어가던 어떤 남자의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다. 그는 몸도 쇠약해진 터에 병적인 상상력마저 기승을 부려 온갖 괴기스러운 환영에 둘러싸이게 됐고, 그것이 실재라고 믿기까지 했던 탓에 외로움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는 육체와 정신이 건강하고 힘이 넘치니, 지금과 비슷하지만 훨씬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교제를 통해서도 지속적으로 기운을 얻고, 우리가 결코 혼자가 아님을 알아 갈 수도 있을 터다. 

 

     내 집에는 참으로 많은 친구가 있다. 아무도 찾지 않는 아침나절이면 특히 더 붐빈다. 내 상황을 제대로 전하고자 몇 가지 비유를 들어보도록 하겠다. 호수에 살며 떠들썩하게 웃어 젖히는 물새나 월든 호수 자체가 외롭지 않듯이 나도 외롭지 않다. 저 외로운 호수에게 어떤 친구가 있겠는가? 그럼에도 호수는 그 담청색 물속에 푸른 악마가 아닌, 푸른 천사를 품고 있다. 태양은 혼자다. 안개가 자욱한 날이면 간혹 태양이 두 개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나는 하나가 가짜라는 사실을 안다. 하느님 역시 홀로다. 그러나 악마는 결코 혼자인 법이 없다. 늘 떼를 지어 돌아다닌다. 한마디로 악마는 군대다. 초원에 핀 멀런이나 민들레, 콩잎이나 괭이밥, 혹은 띠 호박벌이 외롭지 않듯, 나도 외롭지 않다. 밀브룩이나 풍향계, 북극성, 남풍, 4월의 소나기, 1월의 해동, 그리고 새로 지은 집에 자리 잡은 첫 번째 거미가 외롭지 않든, 나도 외롭지 않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고독' 중 

 

***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하는 이들이 하도 미니멀리스트의 선구자이자 갓퐈덜, 미국판 삼시 세 끼의 기록이라고 칭송하여 읽어본 월든. 그래서 난 또 뭔가 되게 포근하고 목가적이고 마음이 차분해지며 은은히 엄마미소가 절로 지어지는 그런 내용일 줄 알았더니 이거슨 거의 스뽜르똬 300급의 빡셈을 지닌 치열한 읽을거리였다. 간단히 말하자면 지금으로부터 먼 옛날 사회성도 성격도 그다지 좋지 않은 젊고 호기로운 꼰대 양키가 외딴 호숫가 숲의 땅을 무단 점거, 취식하며 살아본 썰을 풀어놓은 이야기였다. 나야말로 너무 어이없을 정도로 순진한 상상을 한 것이 아닌가 싶다. 어렸을 때부터 디즈니 만화영화를 많이 보며 자랐는데 그중에 백설공주를 혹시 기억하시는지? 난쟁이들의 집에 얹혀살게 된 백설이가 님들이 아오지 탄광에 일하러 나간 사이 집 청소나 해야겠다 하면서 고군분투하는데, 온 숲의 크고 작은 동물들이 지들 깜냥 되는 대로 열심히 도와주는 장면. 나도 모르게 그런 상상을 해보고 (디즈니의 세뇌가 이렇게 무섭습니다) 방심하고 책장을 넘겼다가 '헐! 대박' 한 것이다. 화자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 자신부터가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거 집에 별 일은 없고? 묻고 싶을 정도) 기본적으로 무척 염세적인 태도를 숨기지 않는데 나영석 힐링 예능인 줄 알고 들어왔다 신서유기에서 강호동한테 개 쳐 뚜드려 맞은 느낌이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적으로 더욱 신선하게 다가왔고 여러 꼭지들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어떤 의미에서든 치열하지 않은 삶이란 존재하는 것일까? 그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본다면 뭐라고 말할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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