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구어구 - 43
- 2019.07.17 괜히 좋아하는 말말
- 2019.05.07 나만의 방
- 2019.05.06 섭섭하기는.
- 2019.05.02 음악을 듣는다는 것
- 2019.05.01 낭만적 민감성
- 2019.04.30 구원의 확신
- 2019.04.02 눈의 나라 - 눈에 등불이 켜진 여자.
- 2018.07.24 the most boring thing.
- 2018.07.09 생명력 지랄을 떨고 있네
- 2018.06.26 너의 모습을 뒤쫓는 것
"우리가 반복적으로 행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그렇다면 탁월함이란 행동이 아닌 습관인 것이다. " - 아리스토텔레스
- 탁월함이란.
"광기의 가장 순수한 형태는 다른 결과가 나오리라 기대하며 똑같은 것을 반복하는 행동이다. " - 아인슈타인
- 나는 미치지 않았는지.
"세상 누구에게도 당신의 문제를 절대 말하지 마라. 20%는 당신의 말에 신경쓰지도 않고 나머지 80%는 당신이 문제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반긴다. " - 루 홀츠
- 나의 아픔에 변태처럼 즐거워하지 말고 거울을 보기 바란다.
"과거에 집착하지 마라. 미래도 꿈꾸지 마라.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마음에 집중하라. " - 부처
- 희망도 기대도 갖지 마라.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들이 나의 가장 중요한 일들을 좌우해서는 안된다. " - 괴테
- 넷플릭스 그만 봐라.
"What does not kill me, makes me stronger. " - 니체
- 이 말은 좀 정도껏 들어야할 필요가 있다. 그러다 진짜 죽으면 곤란하기 때문에.
참으로 신기한 일이지만 나는 서른 살이 될 때까지 내가 소설을 쓰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대학교 때 결혼해서 줄곧 일을 하며 생활에 쫓기다보니 글씨를 쓰는 일조차 거의 없었습니다. 빚을 내여 작은 가게를 하며 생활을 꾸려나갔습니다. 별다른 야심도 없었고 즐거움이라면 매일같이 음악을 듣고 짬짬이 좋아하는 책을 읽는 것뿐이었습니다. 나와 아내와 고양이는 느긋하고 조용하게 살아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소설을 쓰기로 했습니다. 어쩌다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어쨌든 써보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래서 문구점으로 가서 만년필과 원고지를 사왔습니다(그때까지 만년필도 없었습니다). 밤늦게 일을 끝내고 혼자 주방 식탁에 앉아 소설(같은 것)을 썼습니다. 혼자 서툰 손놀림으로 나만의 '방'을 조금씩 만들어갔던 것입니다. 나는 그 때 위대한 소설을 쓸 생각은 없었고(쓸 가능성도 없었고)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글을 쓸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저 내 마음의 평안을 위한 편하고 기분 좋은 장소를 마련하고 싶었습니다. 나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물론 그 방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편안하고 유쾌한 장소가 된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나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라는 짧은 소설을 썼습니다. 그리고 소설가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이따금 무척이나 신기합니다. 내가 어쩌다 소설가가 되었을까. 나는 언젠가는 소설가가 될 수밖에 없었을 거라는 생각도 들고, 그저 막연히 흘러가다보니 우연히 소설가가 되어버린 것 같기도 합니다. 처음부터 소설가의 자격을 갖추고 있었던 것도 같고, 그런 건 딱히 없었는데 나중에 부지런히 만들어냈다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상관없습니다. 그것은 솔직히 별문제가 아닙니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도 여전히 소설을 쓰고 있고, 아마 앞으로도 꾸준히 쓸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 무라카미 하루키, 멀리까지 여행하는 방 중.
***
글을 쓰는 것은 그저 내 마음의 평안을 위한 편하고 기분 좋은 장소를 만들어 가는 행위라는 말이 내 맘에 걸렸다. 나 역시 나 자신을 구원하고 나중에는 타인의 마음또한 놓이게 하는 장소를 만들어 간다면 좋겠다. 물론 그런 야망 따위는 없다.
환상 속의 덜희 (0) | 2019.07.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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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민감성 (0) | 2019.05.01 |
봄도 봄이지만
영산홍은 말고
진달래 꽃빛까지만
진달래 꽃 진 자리
어린 잎 돋듯
거기까지만
아쉽기는 해도
더 짙어지기 전에
사랑도
거기까지만
섭섭하기는 해도 나의 봄은
거기까지만
- 연두, 정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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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 일어나 보니 선생님께서 이 시를 직접 옮겨 적으신 메모를 사진으로 찍어 보내주셨다. 너무 좋아서 써보셨다고 한다. 선생님의 글씨는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맞아 이런 흐늘 흐늘한 진달래 같은 필체를 갖고 계셨다.
나는 대학 시절 학부 필수 과목, 전공 과목들과 함께 한 학기에 늘 적어도 한 과목 정도는 완전히 쌩뚱맞은 수업을 듣고는 했다. 주로 음악 감상, 독서 토론, 서양 미술사, 현대 미술의 이해, 프랑스 문학과 예술 등 전공과는 전혀 관련 없지만 늘 나에게 미지와 동경의 세계였던 예술과 관련된 것들로 기억한다. 그 중에서도 인상적으로 수강했던 것이 바로 '생활 원예' 수업이었는데, 삼성 에버랜드가 자연 농원이던 시절 이병철 회장의 부름을 받아 그곳을 튤립으로 물들이는 작업을 담당했던 노교수님의 수업이었다. 갑자기 기말고사를 아침 8시 공대 건물에서 봤던 기억이 나는데, 야행성에다가 공대 건물에 갈 일이 많지 않았던 당시의 내게 무척 낯설고 당황스럽기까지한 아침이었던 기억이 난다. 아무튼 나를 포함한 생활 원예 수강생들은 노교수님과 함께 양재 화훼 시장으로 답사를 나가기도 했고 우리 대학교 내 여기 저기에서 자라고 있었지만 독수리상의 독수리가 하늘을 날고 한글탑이 돌 때까지 술만 마시느라 그동안 별다른 관심을 기울인 적이 없던 (존재 조차 눈치채지 못했던) 식물들을 사진으로 찍어 그 아이들의 '이름'을 알아내 레포트를 제출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다른 줄도 몰랐던 진달래와 철쭉을 구분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간단히 말해 진달래는 잎보다 꽃이 먼저 흐늘흐늘 연약하게 피면서 주로 옅은 분홍빛을 띄고 먹을 수 있는 반면, 철쭉은 잎과 꽃이 무성하게 뾰족 뾰족나고 상대적으로 짙은 색을 띄고 먹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개화 시기가 약간 다르긴 하지만 역시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그 놈이 그 놈 같이 생겼기 때문에 수업에서 배운 구분법으로 교내의 진달래만을 정교하게 수집하여 반 건물 뒷 마당에서 선배들과 화전 부쳐먹은 기억이 떠오른다. 당시 내게 화전이라는 것은 소설에서나 본 미지의 요리였기 때문에 몹시 궁금했던 나는 반 사람들을 모아 '학교에 진달래도 피었으니 화전이라는 걸 다같이 만들어 먹어봅시다! 와이낫?' 하고 강력히 추진했었다. 정작 그렇게 만든 화전의 맛은 별 감흥이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지금도 사실 마찬가지지만 대학 시절 나는 정말 보통 놈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이 시를 읽고 나서 든 생각은 그렇다면 어떻게 철쭉과 영산홍을 구별하는 가였다. 찾아보니 꽃의 크기와 수술의 개수, 잎이 지는지 등의 차이가 있는 모양이지만 솔직히 잘 모르겠다.
괜히 좋아하는 말말 (0) | 2019.07.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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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방 (0) | 2019.05.07 |
음악을 듣는다는 것 (0) | 2019.05.02 |
낭만적 민감성 (0) | 2019.05.01 |
구원의 확신 (0) | 2019.04.30 |
나이를 먹어서 좋을 일은 별로 없다고 생각하지만, 젊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 보인다거나 몰랐던 것을 알게 되는 건 기쁜 일입니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면서 전보다 전체상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혹은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디면서 지금까지 알아채지 못했던 디테일에 불현듯 눈뜨게 됩니다. 그게 나이를 먹어가는 기쁨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경험은 인생에서 하나를 얻은 것 같은 흐뭇함에 젖어들게 합니다. 물론 반대로 젊을 때만 이해할 수 있는 음악이나 문학도 있지만요.
나에게 음악이 가진 최대의 훌륭함은 무엇일까? 그것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의 차이를 확실히 구분한다는 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큰 차이도 알고 중간 정도 차이도 알고, 경우에 따라서는 아주 미묘한 작은 차이도 식별할 수 있죠. 물론 그것은 나한테 좋은 것, 나한테 나쁜 것이라는 뜻이니 그저 개인적인 기준에 불과할 뿐이지만, 그 차이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인생의 질이라고 할 만한 것까지 크게 달라지게 만드니까요. 끊임없는 가치 판단의 축적이 우리의 인생을 만들어갑니다. 그것은 사람에 따라 그림일 수도 있고 와인일 수도 있고 요리일 수도 있지만 내 경우는 음악입니다. 그런 만큼 정말로 좋은 음악을 만났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큽니다.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살아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듭니다.
여백이 있는 음악은 싫증나지 않는다 중 - 무라카미 하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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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하루키는 소설보다는 수필이 좋은 작가이다. 그의 경험과 생각이 여과없이 녹아 있고 짧고 쉽게 쓰여져 있어 누구나 읽고 이해하기 쉽다. 올해엔 내가 가지고 있는 종이책들을 미련이 남지 않도록 다 읽고 방출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요즘 그의 잡문집을 다시 읽고 있다. 아무 페이지나 잡히는 대로 한 꼭지씩 읽어도 재밌고 그 날의 기분에 따라 오늘은 이 사람의 음악에 대한 생각을 들어보자 하는 마음으로 음악에 관련된 글을 읽기도 한다. 그래서 오늘은 음악입니다.
나는 그를 만난 적은 없지만 또한 한 인간으로서도 존경하는 편인데, 그는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새벽 4시에 기상해서 6시간 글을 쓰고 (혹자에 의하면 400자 원고지 10장 분량까지 반드시 쓰고 멈춘다고 한다) 밖에 나가 달리고 수영을 하고 샐러드를 즐기고 독서, 음악감상을 하고 9시엔 취침하는 일과를 가지고 있다. 올빼미에 잠도 잘 안 자고 꽤 방탕한 젊은 시절을 보낸 나에게 이런 스토익하고 규칙적인 삶이란 차마 범접할 수 없는 영역처럼 느껴졌지만 지금은 나도 그와 비슷한 하루 하루를 보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책을 읽고 영어공부를 하고 아침을 먹고 운동을 하고 논문을 쓰고 자기 전에 짧은 동영상을 한 편 보고 일찍 잠자리에 든다. 이게 지루해보일지 모르지만 이 과정에서 꽤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정말.
지금보다 어리고 쉽게 상처받던 시절 아버지는 나에게 충고를 한마디 해 주셨는데, 나는 아직도 그 충고를 마음속 깊이 되새기고 있다.
"누구든 남을 비판하고 싶을 때면 언제나 이 점을 명심하여라."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세상 사람이 다 너처럼 유리한 입장에 놓여 있지는 않다는 것을 말이다."
아버지는 더 이상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우리 부자는 언제나 이상할 정도로 말없이도 서로 통하는 데가 있었고, 나는 아버지의 말씀이 그보다 훨씬 많은 뜻을 함축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모든 일에 판단을 유보하는 버릇이 생겼고, 그 때문에 이상한 성격의 소유자들이 자주 나에게 다가오는 바람에 그야말로 지긋지긋한 사람들에게 적잖이 시달려야 했다. 비정상적인 사람들은 정상적인 사람에게 그런 특성이 나타나면 재빨리 알아차리고 달라붙게 마련이다. 내가 알지도 잘 알지도 못하는 난폭한 녀석들의 은밀한 슬픔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대학에 다닐 때 억울하게도 정치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들은 대부분 내가 원하지도 않는데 찾아와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그래서 그들이 은밀한 고백을 털어놓을 기미가 확실하다 싶으면, 나는 종종 잠을 자는 척하거나 뭔가에 몰두해 있는 척하거나 아니면 악의를 품은 듯이 일부러 경망스럽게 굴었다. 젊은이들의 은밀한 고백, 아니면 적어도 그런 고백을 하면서 사용하는 표현이란 흔히 남의 말을 표절한 경우가 많고, 그것을 억지로 숨기려고 하다보니 대개 흠이 나 있게 마련이다. 판단을 유보하면 무한한 희망을 갖게 된다. 우리 아버지가 점잔을 빼며 말씀하셨고 지금 내가 점잔 빼며 다시 이야기하듯이 기본적인 예절 감각이란 태어날 때부터 저마다 다르게 분배되는 것이며, 그 사실을 깜박 잊어버릴 때면 뭔가를 놓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렇게 내가 관대한 것처럼 자랑했지만 나는 이런 관대함에도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인간의 행동이란 단단한 바위 덩어리나 축축한 습지에 근거를 둘 수도 있지만, 나는 일정한 단계가 지난 뒤에는 그 행위가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는지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지난해 가을 동부에서 돌아왔을 때, 나는 이 세계가 제복을 차려입고 있기를, 말하자면 영원히 '도덕적인 차렷' 자세를 취하고 있기를 바랐다. 나는 이제 더 이상 특권을 지닌 시선으로 인간의 내면세계를 오만하게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오직 이 책에 이름을 제공해 준 개츠비만이 내가 이러한 식으로 반응하지 않은 예외적인 인물이었다 - 내가 드러내 놓고 경멸해 마지않는 것을 모두 대변하는 개츠비 말이다. 그러나 만약 인간의 개성이라는 게 일련의 성공적인 몸짓이라면 그에게는 뭔가 멋진 구석이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는 마치 1만 5000킬로미터 밖에서 일어나는 지진을 감지하는 복잡한 지진계와 연결되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삶의 가능성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러한 민감성은 '창조적 기질' 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되는 그럼 진부한 감수성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것은 희망에 대한 탁월한 재능이요, 다른 어떤 사람한테서도 일찍이 발견한 적이 없고 또 앞으로도 다시는 발견할 수 없을 것 같은 낭만적인 민감성이었다. 그래, 결국 개츠비는 옳았다. 내가 잠시나마 인간의 속절없는 슬픔과 숨 가쁜 환희에 흥미를 잃어버렸던 것은 개츠비를 희생물로 삼은 것들, 개츠비의 꿈이 지나간 자리에 떠도는 더러운 먼지들 때문이었다.
- 위대한 개츠비 중, 스콧 피츠제럴드
*주말 동안 기다려온 해피해킹 타입에스가 방금 도착했고, 나는 계획했던 대로 위대한 개츠비의 첫 부분을 이 키보드로 작성하기 시작했다. 내 평생을 함께 할 동지를 얻은 느낌이라 무척 설렌다. 백무각이라 너무도 말끔하여 나의 손 끝 기억력을 자극한다는 점도 흥미롭다. 일단 맥과의 호환성이 좋다는 것에 이견은 없고 오래 사용하기에 기분 좋은 입력 장치를 만난 것 같아 좋다.
위대한 개츠비 작품에 대한 할 말이 사실 많지만 일단 키보드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싶다. 아주 어렸을 때, 컴퓨터 신동인 오빠가 부러워 엄마를 졸라 컴퓨터 학원에 다닌 적이 있었다. 당시엔 무려 도스 운영 체제였고 너무도 당연한 듯 씨알티 모니터와 기계식 키보드를 사용했다. 나는 한글과 영문 자판을 외워 타자 연습을 하는 것을 무척 좋아했는데, 날마다 유독 탐내는 컴퓨터 자리가 있었다. 당시엔 획기적이었던 윈도우 운영체제를 가진 최신 컴퓨터가 아니었는데도 도각 도각하는 자판 두드리는 소리가 퍽 마음에 드는 자리였던 걸로 기억한다. 지금 이 키보드를 사용해보니 나도 모르게 그 때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든다. 그 시절 컴퓨터 학원이 끝나면 나를 집 앞까지 졸졸 따라오며 줄기차게 괴롭혔던 쪼그만 남매의 얼굴도 떠오른다. 당시 나는 성숙한 초딩이(라고 믿고있)었고 그들은 고작해야 유딩 정도 되는 아기들이었는데 아직도 왜 아는 사이 조차 아니었던 나를 집요하게 쫓아다녔는지 알 수 없다. 정말 소심한 울보였던 나는 그들에게 '쫓아오지 마' 이상의 아무 대응도 하지 못했고 결국 그 매일의 고통을 견디다 못해 어느 날 가던 길을 멈추고 애원하듯 외쳤다! 당시 내가 뭐라고 외쳤는지는 정확히 생각나지 않는다. 그저 지금의 내가 기억하는 것은 그 순간 그 남매가 무척 놀란 듯한, 미안한 듯한 뭔가 복잡한 슬픈 표정을 지었었고, 나를 따라오던 것을 멈추고 발길을 돌렸다는 것과 그 뒤로는 학원에도 나오지 않고 나를 뒤쫓는 일도 없었다는 것이다.
왜 이런 잊고 있던 이야기를 떠올렸고 주절거리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냥 이 훌륭한 새 키보드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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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피츠제럴드가 훌륭한 작가라는 사실은 제아무리 현실에 가혹하게 시달려도 글에 대한 신뢰를 거의 잃지 않았다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 가장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은 글을 씀으로써 구제되리라 굳게 믿었다. 아내의 발광도, 세간의 냉랭한 묵살도, 서서히 육체를 좀먹어가는 알코올도, 옴짝달싹할 수 없을 만큼 불어난 빚도 그 뜨거운 믿음을 앗아갈 수는 없었다.
그것은 글을 통한 구원을 믿지 못해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옛 기숙사 친구 헤밍웨이의 운명과는 완전히 대조적이었다. 피츠제럴드는 죽음 직전까지 매달리듯 계속해서 소설을 썼다. '이 소설만 완성하면......' 하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모든 것이 회복된다.'
새로 탄생할 작품이야말로, 그것을 만들어내고자 고투하는 자신의 영혼이야말로, 그를 이끌어주는 먼 등대의 불빛이었다. 마치 <위대한 개츠비>의 주인공인 불행한 제이 개츠비가 후미진 맞은편 물가에서 점멸하는 등대 불빛을 유일한 버팀목 삼아 오탁으로 가득한 세상을 열심히 살아가듯이. 반세기가 넘는 세월이 지난 지금도 수많은 독자가 피츠제럴드의 작품들에 열광하는 가장 큰 이유는 '멸망의 미학'이 아니라, 그것을 능가하는 '구원의 확신'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 스콧 피츠제럴드, 재즈 시대의 기수 중 - 무라카미 하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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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력 지랄을 떨고 있네 (0) | 2018.07.09 |
거울 속에는 저녁 풍경이 흘렀다. 비쳐지는 것과 비추는 거울이 마치 영화의 이중노출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등장인물과 배경은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게다가 인물은 투명한 허무로, 풍경은 땅거미의 어슴푸레한 흐름으로, 이 두 가지가 서로 어우러지면서 이세상이 아닌 상징의 세계를 그려내고 있었다. 특히 처녀의 얼굴 한가운데 야산의 등불이 켜졌을 때, 시마무라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가슴이 떨릴 정도였다.
아득히 먼 산 위의 하늘엔 아직 지다 만 노을빛이 아스라하게 남아,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먼 곳까지 형체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색채는 이미 다 바래고 말아 어디건 평범한 야산의 모습이 한결 평범하게 보이고 그 무엇도 드러나게 주의를 끌 만한 것이 없는 까닭에, 오히려 뭔가 아련한 커다란 감정의 흐름이 남았다. 이는 물론 처녀의 얼굴이 그 속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차창에 비치는 처녀의 윤곽 주의를 끊임없이 저녁 풍경이 움직이고 있어, 처녀의 얼굴도 투명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정말로 투명한지 어떤지는, 얼굴 뒤로 줄곧 흐르는 저녁 풍경이 얼굴 앞을 스쳐 지나는 듯한 착각을 일으켜 제대로 확인할 기회가 잡히지 않았다.
기차 안도 그리 밝은 편은 아니었고 진짜 거울처럼 선명하지도 않았다. 반사가 없었다. 그래서 시마무라는 들여다보는 동안, 거울이 있다는 사실을 점차 잊어버리고 저녁 풍경의 흐름 속에 처녀가 떠 있는 듯 여기게 되었다.
바로 그 때, 그녀의 얼굴에 등불이 켜졌다. 이 거울의 영상은 창밖의 등불을 끌 만큼 강하지는 않았다. 등불도 영상을 지우지는 못했다. 그렇게 등불은 그녀의 얼굴을 흘러 지나갔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을 빛으로 환히 밝혀주는 것은 아니었다. 차갑고 먼 불빛이었다. 작은 눈동자 둘레를 확 하고 밝히면서 바로 처녀의 눈과 불빛이 겹쳐진 순간, 그녀의 눈은 저녁 어스름의 물결에 떠 있는 신비스럽고 아름다운 야광충이었다.
-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 중.
이걸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나는 한숨이 나와버렸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문체를 설명하는 진부한 단어로 '섬세함'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내 생각에 표현의 진부함을 떠나서 이건 '섬세'라는 단어만으로는 좀체 설명할 수 없다. 저릿하게 느껴지는 작가의 극한의 관찰력. 눈의 나라를 달리는 열차 안에서 차창에 비친 여자의 얼굴과 그 너머로 빠르게 지나치는 풍경의 흐름이 겨울의 찬 습기에 착 달라 붙어 있는 광경이 내 눈 앞에서 그대로 재생되어 버렸다. 마치 '눈에 등불이 켜진 여자'의 얼굴, 그 위 보송한 솜털에 앉은 겨울의 차가운 기운, 아주 작은 물방울까지 봐버린 것 같다. 차라리 이것은 뱃 속이 묘하게 간지러운 듯한 느낌과 비슷하다. 으윽. 역설적으로 나는 현실의 감각을 잃어버리고 약간 멍해져 버렸다. 멍멍
낭만적 민감성 (0) | 2019.05.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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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확신 (0) | 2019.04.30 |
the most boring thing. (0) | 2018.07.24 |
생명력 지랄을 떨고 있네 (0) | 2018.07.09 |
너의 모습을 뒤쫓는 것 (0) | 2018.06.26 |
That might sound boring but I think the boring stuff is the stuff I remember the most.
-Russell, Up (2009)
구원의 확신 (0) | 2019.04.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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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나라 - 눈에 등불이 켜진 여자. (0) | 2019.04.02 |
생명력 지랄을 떨고 있네 (0) | 2018.07.09 |
너의 모습을 뒤쫓는 것 (0) | 2018.06.26 |
너는 뭐야 (0) | 2018.06.13 |
"나는 생명력 넘치는 인간을 좋아하는데, 당신은 생명력 그 자체야. "
"놀리지 마세요."
"아니, 내 얘기 들어봐. "
나는 손을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당신은 말이야, 죽고 싶다느니 이제 인생은 끝이라느니, 하며 부정적으로 말하지만, 사실은 삶에 대해 상당히 집착하고 있어. 살고자 하는 마음이 강하니까 범죄를 거들면서까지 삶의 길을 택한 거야. 자식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것도 그렇지. 삶에 애착이 없다면 자식의 입장 따윈 안중에도 없을 거야. 말하자면 당신은 아직 인생을 포기하지 않은 거지. 아니, 포기할 수 없는 거야. 거액의 빚을 지고 호라이 클럽에게 이리저리 끌려 다니지만, 당신은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았어. 살다보면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그래서 아직 살아 있는 거고. 당신 자신은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그런 마음이 분명히, 그것도 아주 강하게 자리 잡고 있어.
나는 당신의 그런 점, 어떻게든 살아보겠다는 그 생명력에 매력을 느끼고 있어. 부득이한 사정이 있다고는 해도, 호라이 클럽과 함께 일한 것은 잘못이야. 절대 용서할 수 없지. 경찰서로 데려가기 전에 두세 방 날려주고 싶을 정도야. 하지만 당신이 저지른 잘못과 당신이 생명력을 갖고 살아가는 건 별개의 얘기야. 사람들은 흔희 '좋아한다, 싫어한다'는 것과 '좋다, 나쁘다'는 걸 혼동하는 경향이 있는데, 나는 정확히 구별할 수 있지. 피트 로즈가 야구 도박을 하든, 그 때문에 야구계에서 영원히 추방되든, 나는 그가 친 4256개의 안타를 높이 평가하고 있어. 그가 미일 야구에서 보여준 헤드 슬라이딩은 결코 잊을 수가 없지. 암. 그걸 어떻게 잊겠어. 1978년 11월 5일에 벌어진 일곱번째 경기, 장소는 고라쿠엔 구장, 4회말...... 어쨌든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비록 살인을 거들었다고 해도 당신의 인격을 전면 부정하진 않겠다는 거야."
-우타노 쇼고,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위의 서술은 흔한 섬나라의 범죄자 대화
야 나는 이제 일본의 사회파 미스터리라 부르는 것들은 도저히 못 읽겠다 아주 지랄 옘병을 떨고들 앉았네 이게 어째서 미스터리...? 서술트릭 하나가지고 미스터리라고 말하고 싶나본데 나는 서술트릭을 쓴 건지도 몰랐다 와 무슨 벚꽃 나무 아래서 범죄를 미화하고 거지발싸개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지금 사정상 병원에 입원 중이라 너무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책 좀 들고 와 달라고 한건데 그냥 심심한 채로 있는 게 훨씬 좋았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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めぐりあひて
見しやそれとも
わかぬまに
雲がくれにし
夜半の月かな
As I was wondering
whether or not I had seen it
by chance,
it became cloud-hidden,
the face of the midnight moon
오랜만일세
자넨가 하는 사이
떠나가 버렸네
구름 뒤로 숨어 버린
한 밤의 달과 같이
-무라사키 시키부, 백인일수 57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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