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구어구 - 43

  1. 2018.06.13 너는 뭐야
  2. 2018.06.01 Joy and Sorrow
  3. 2018.04.28 기대하다 잃어버린 것.
  4. 2018.03.29 계절감
  5. 2018.02.13 돌과의 대화
  6. 2017.04.11 핫소스
  7. 2017.04.10 안부를 묻는다는 것
  8. 2017.03.31 어떤 이와 가장 가까워진다는 것
  9. 2017.03.08 어느 사이에.
  10. 2017.03.01 외로움을 눈치챈다는 것

물감을 떨어뜨렸다 


사방에 물이 튀었다

사방으로 감이 사라졌다


아무것도 그릴 수 없다


나는 잠시 바닥과 그윽한 사이가 된다


너는 누구인가

너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너는 섣불리 너를 드러내지 않는다


너는 선명한가

너는 말랑말랑한가


접촉 없이는 너를 파악할 수 없는가


물이 좋은가 너는

질이 나쁜가 너는


문득 나는 너를 온몸에 덕지덕지 바르고 싶어진다 


손을 길게 내뻗으면

너를 만질 수 있는가


너는 사방에 너무 멀리 있다

가까이 다가가기도 겁난다


너를 감각하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가

나의 방법론으론 너를 파악할 수 없는가


찬물을 한 잔 들이켜고

순순히 너를 포기해야 하는가


물감은 고집스럽게 굳고 있다


여기는 사방의 중심

나는 끈질기게 묻는다


내가 과연 감을 되찾을 수 있는가

물질은 변화할 수 있는가


나는 내가 누구인지 자신이 없다

네가 무엇인지는 더더욱


사방이 불투명해지는 지금


물감이 바닥을 박차고 일어나


내 손바닥 위에서 흐르기 시작한다면

바닥이 융기해서 

나를 들뜨게 한다면


캔버스를 활짝 펼쳐


기꺼이 너를,

너로써 후원하고 싶다 



- 물질, 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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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한 여인이 말했다. 우리들에게 기쁨과 슬픔에 대해 말씀해 주소서,


그러자 그가 대답했다-


그대 기쁨은 가면을 벗은 그대 슬픔이니라.


그대 웃음이 솟는 그 우물이 때로는 그대 눈물로 채워짐과 똑같도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것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그대 존재 속으로 그 슬픔이 더욱 깊이 파고들면 들수록 그대가 간직한 기쁨은 더욱 커지리.


그대 포도주를 담은 잔은 도공의 가마에서 구워진 바로 그 잔이 아닌가?


그리고 그대 영혼을 위로하는 그 기타는 칼로 파낸 바로 그 나무가 아닌가?


그대 즐거울 때 그대 가슴 속으로 깊이 들여다 보라. 그러면 그대는 발견하게 되리라, 그대에게 슬픔을 주었음을.


그대 서러울 때 다시 그대 가슴 속을 보라. 그러면 그대는 알게 되리. 사실은, 그대 기쁨이었던 그것 때문에 그대가 울고 있음을.



그대 가운데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하리.


"기쁨은 슬픔보다 위대한 것." 또 다른 이는 이렇게 말하리, "아니야, 슬픔이 더욱 더 위대하다."


그러나 나는 그대들에게 말하노니, 그것들은 갈라 놓을 수 없는 것.


그것들은 함께 와서 한쪽만이 그대 식탁에서 그대와 함께 앉아 있을 때, 다른 한 쪽은 그대 침대 위에서 잠들고 있음을 기억하라.



진실로 그대는 저울처럼 그대 슬픔과 그대 기쁨 사이에 매달려 있음이여. 


오로지 그대 비어 있을 때만 그대는 멈춰 균형을 지니리니.


보석지기가 그의 금과 그의 은을 달고자 그대들을 들어올릴 때, 그대들의 기쁨과 그대들의 슬픔 또한 올라가거나 내려가거나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을. 



- 기쁨과 슬픔에 대하여, 예언자 중. 칼릴 지브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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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리막이 손짓한다

오르막이 그랬듯이,

기억은 일종의

성취,

하나의 소생,

심지어

하나의 시작, 기억이

지금껏 몰랐던

새로운 무리가 사는

새로운 장소들을 펼쳐주니까

또 그 무리는

(설령 전에는 단념했던 것들이라 할지라도)

새로운 목표를 향해 나아가니까.


어떠한 실패도 완전한 실패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실패가 여는 세상은 늘

이전에는

생각지도 못한 곳이니까

놓쳤던 세계,

생각지도 못한 세계가

새로운 곳으로 손짓해 부른다

어떠한 (잃어버린) 순백도 순백에 대한 기억만큼

하얗지는 못하다.


어스름 내리며 사랑이 눈뜬다

아직

태양이 빛나

그림자 드리워 있지만

이제 나른해진 그림자

욕망에서 떨어진다.


밤이 깊어가면서

그림자 없는 사랑

꿈틀대며

눈뜨기 시작한다.


절망으로 가득하고

이룬 것 없는 

내리막에서

새로운 깨달음이 온다.


그것은 절망의

역전.

이루지 못한 것,

사랑이 거부 당한 것,

기대하다 잃어버린 것을 위해

내리막이 뒤따른다

끝도 없고 파괴할 수도 없는 내리막이. 


- 내리막,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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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퉁이가 좋았다

기대고 있으면 

기다리는 자가 되어 있었다


바람이 불어왔다가 물러갔다 

뭔가가 사라진 것 같아 

주머니를 더듬었다


개가 한 마리 다가오고 있었다

처음 보는 개 

개도 나를 처음 봤을 것이다


내가 개를 스쳤다

개가 나를 훑었다 


낯이 익고 있다

냄새가 익고 있다 

가을은 정작 설익었는데

가슴에 영근 것이 있어 

나도 모르게 뒤돌아 보았다


땀을 흘리는데도 

개는 가죽을 벗지 않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


땀을 흘리는데도 

나는 외투를 벗지 않고 있었다

어찌하지 않은 일


우리는 아직 껍질 안에 있다


뭔가 잡히는 것이 있어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꼬깃꼬깃 접힌 영수증을 펴보니

다행히 여름이었다


미련이 많은 사람은

어떤 계절을 

남보다 조금 더 오래 산다 



계절감 - 오은. 


++++


자발적 남겨짐. 

그러나 어찌하지 않은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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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돌의 문을 두드린다.

-나야, 들여보내줘.

네 속으로 들어가서 

주위를 빙 둘러보고,

숨처럼 너를 깊게 들이마시고 싶어.


돌이 말한다.

-저리 가, 난 아주 견고하게 닫혀 있어.

내 비록 산산조각 나더라도

변함없이 굳게 문을 잠글 거야.

부서져 모래가 되고, 가루가 된다 한들

아무도 들여보내지 않을 거야.


나, 돌의 문을 두드린다.

-나야, 좀 들여보내줘.

난 그저 순수한 호기심으로 널 찾아왔어.

호기심에게 인생이란 절호의 기회잖아.

난 너의 궁전을 거닐고 싶어.

그런 뒤에 나뭇잎과 물방울을 차례로 방문할 거야.

모든 걸 다 체험하기엔 시간이 너무 촉박해. 

언젠가는 죽을 테니까.

넌 분명 이해해줄 거라 믿어.


돌이 대답했다.

-나는 돌로 만들어졌어.

그러니까 철저하게 엄숙함을 지켜야 해.

어서 썩 물러나.

내게는 웃음의 근육이란 없어.


나, 돌의 문을 두드린다.

-나야, 들여보내줘.

네 속에 커다란 빈방이 있다는 얘길 들었어.

이제껏 아무도 본 적 없는, 허허롭고 아름다운,

그 누구의 발자취도 없는, 무감각한 방.

사실은 너도 그 방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지?

이제 그만 인정하지 그래?


돌이 응수한다.

-커다란 방이라구?

그러나 그 안엔 빈자리가 없어.

어쩜 아름다울 수도 있지만

네 보잘것없는 미감을 초월한 곳이야.

나에 대해 어깨너머로 대강은 알 수 있겠지만

내 전부를 속속들이 이해할 수는 없을 거야.

겉으론 너를 향하는 듯해도

나의 내면은 네게서 온전히 돌아서 있는 걸.


나, 돌의 문을 두드린다.

-나야, 들여보내줘.

네게서 영원한 안식처를 찾는 건 아니야.

나는 불행한 사람도 아니고,

집 없는 떠돌이도 아니야.

내가 사는 세상은 충분히 돌아갈 만한 가치가 있어.

빈손으로 들어갔다 빈손으로 나올게.

내가 진짜 갔다 왔다는 유일한 증거는

어느 누구도 믿지 못할

몇 마디의 말뿐일 텐데.


돌이 대꾸한다.

-들어오지 마.

네게는 동참의 의지가 전혀 없잖아. 

그 어떤 감상도 네 진심을 대신할 순 없는 법.

폭넓은 식견을 자랑하는 예리한 관찰력도

함께하고픈 마음이 부족하면 아무런 쓸모도 없잖아.

들어오지 마, 넌 그저 의지를 가져야겠다는 결심만 있을 뿐.

의지의 싹과 상상력만 가졌을 뿐.


나, 돌의 문을 두드린다.

-나야, 제발 들여보내줘.

네 지붕 밑으로 들어가기 위해

이천 세기씩이나 기다릴 순 없잖아.


돌이 응답한다.

-만일 나를 믿지 못한다면

나뭇잎에게 물어보렴. 나와 똑같이 말할 테니까.

물방울에게 물어보렴.  나뭇잎과 똑같이 말할 테니까.

마지막으로 네 머리에서 솟아난 머리카락에게 물어봐.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온다. 박장대소.

비록 나는 웃는 법을 제대로 모르지만. 


나, 돌의 문을 두드린다.

-나야, 들여보내줘.


돌이 말한다. - 내겐 문이 없어.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돌과의 대화.


+++++++


오늘 느낀 감정 그대로. 

똑똑똑

나야. 들여보내줘.

그럴 수 없어.

넌 내가 아니니까 

여기 들어올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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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in : 어구어구 at 2018. 2. 13.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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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애는 드물 뿐더러 오래 지속되지 않지만, 내가 가장 사랑했고 그래서 나를 가장 처참하게 부숴버린 그는 스크램블 에그에 핫소스를 뿌려 먹는 것을 좋아했다.
나도 그렇게 곧잘 따라 먹곤 했다. 원래 스크램블 에그보다는 써니 사이드 업을 좋아하는 나는, 처음엔 그게 대체 무슨 맛일지 상상하기조차 쉽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내가 아침 식사로 스크램블 에그에 핫소스를 뿌려 먹기까지는 그닥 길지 않은 시간이 흘렀을 것이다.
혼자가 되고, 오랜 시간이 흘러 본디 내가 좋아하던 방식으로 달걀 요리를 해먹으며 또 오랜 시간이 흘렀다. 아주 오랫동안 나는 스크램블 에그도 핫소스도 그 둘의 조합도 그다지 찾지 않았고 (맹세코 의식적으로 피한 것은 아닌데) 지금은 그 맛조차 가물거릴 지경이 되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왠 질척질척 핫소스 타령이냐고? 오늘 저녁으로 만든 구운 양송이 버섯과 적양파와 닭안심을 곁들인 샐러드가 심심해서 한 번 넣어봤다. 그래서 스크램블 에그까지 생각나 버린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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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in : 어구어구 at 2017. 4. 11.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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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다른 용건 없이 전화나 문자를 하는 일이 드물다보니 연락을 하고 안부를 묻는 것이 뭔가 직간접적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행위에 불과했다. 그랬던 것을 최근에 달리 생각해볼 계기가 생겼다. 


최근 몇 달 간 새로 사귄 동네 친구와 자주 어울리고 있는데, 그는 매번 아주 사소한 일상에 대해서 묻는다. 아침에 만나면 어제 저녁은 어떻게 보냈니, 오늘 기분은 어떠니, 오늘은 화요일이니까 세미나가 있겠구나, 주말은 뭘하며 보냈니 등등. 처음엔 이 별 것도 아닌 질문들에 왠지 모르게 선뜻 대답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만큼 타인을 잘 안 만나고 연락을 안 하니 매일 매일 혼자 보내는 시간이, 일상이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져서 뭘 했는지 의식하는 것 조차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타인의 존재는 자극과 불편함일 뿐 혼자 있는 것이 그저 세상 편하고 행복하다고 생각했는데 이것이 어쩌면 나 자신과의 소통마저 단절 시켜 온 것은 아닌지.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뭘 주로 먹는지, 집에서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 오늘 내 기분은 어떤지 아주 오랫동안 예민하게 의식하지 않았던 거다. 


당연히 타인에 대해서도 이런 질문을 던져본 일이 없다. 정말 별 생각 없이,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이는 또 제법 낯선 과거의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하고 묻지도 않았는데 자신에 대해서 끝도 없이 주절거리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제 3자에 대한 험담과 불평. 그 모든 것들이 너무도 너절하고 불쾌해서 더욱더 알고 싶지 않았다. 그에 응대해주거나 그냥 가만히 듣고 말거나 안 궁금하니까 그만 닥쳐라고 말하기 보다 그냥 만나지 않는 것이 좋았다. 심플 앤 세이프 라이프. 그러나 알고 있지 않은가. 심플의 종점은 결국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되리라는 것을. 좋은 사람들을 곁에 두고 관심 갖는 것 마저 그만두면 안된다는 것을.


이것은 나에게 있어, 아주 의미있는 깨달음이었다. 타인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관심을 갖고 질문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에 대해 생각해본다는 것이 정말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적어도 내게는 큰 영향을 미친 것 같다. 하루 하루, 그저 흘러가는 의미 없는 한 시간 한 시간을 붙잡아 의미를 부여하는 것. 마치 이름을 불러주는 것과 같이, 그것의 의미를 눈치 챈다는 것. 달리 말하면 그저 살아간다는 게 이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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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in : 어구어구 at 2017. 4. 10.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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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서로 너무도 많은 것을 알고 있기에 서로 말이 없다.

우리는 서로 침묵을 지키며, 

서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미소를 보낸다. 




-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





잘 알지 못하는 이와 함께 침묵하는 것은 머리통을 쪼이는 듯한 긴장감과 어색함을 불러 일으키지만 

우리들이 함께 하는 침묵은 그렇지 않았다. 

그러하다. 

우리들은 굳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그러나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가장 큰 위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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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는 목수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질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위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지도 않고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 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 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위 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백석.




요즘 틈날 때마다 책을 많이 읽는데 (미니멀리즘 정신에 입각해서 무조건 e-book. 논문도 마찬가지.) 오늘은 일하기가 싫어서 최근에 구입한 백석 시집을 읽었다. 백석은 수능 언어영역 문학을 공부하는 데 있어서 모를 수가 없는 분이자 대표적 훈남 시인인데 (..) 시험 공부 맥락에서 벗어나 그의 작품들을 접한 것은 부끄럽지만 처음인 것 같다. 서정적이고 향토색이 짙게 묻어나면서도 동시에 세련되고 감각적으로 언어를 조탁하는 탁월한 능력을 지닌 분 같다는 생각을 새삼 했다. 


아주 생생하게 눈 앞에 펼쳐지는 듯한 시를 많이 쓰셨는데, 그 중 먹을 거리에 대한 묘사가 놀랍도록 뛰어났다. 레알 시로 먹방찍는 각 ㄷ ㄷ 사실 그런 시를 소개하고 싶었는데, 지금 현재 내가 가장 공감할 수 있었던 시를 뽑자니 결국 대표작 중 하나인 이 시를 올리게 되었다. '남신의주 유동에 사는 박시봉네 집에서' ? 정도의 제목인데 불현듯 정신차려보니 모든 것을 잃은 화자가, 결국 자기 몸 하나 뉘일 방 하나 빌려서 슬픔과 괴로움, 쓸쓸함에 방바닥을 뒹굴 거리며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다. 그는 결국 자신의 중심을 잃지 않으려 그저 담담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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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in : 어구어구 at 2017. 3. 8.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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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꼼짝도 하지 않고 싯다르타는 서 있었는데, 숨 한 번 쉴 짧은 순간 동안,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자신이 얼마나 외로운 존재인가를 알게 되었을 때 그는, 마치 한 마리 작은 짐승이나 한 마리의 새, 또는 한 마리의 토끼라도 된 듯, 가슴 속의 심장이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몇 해 동안 그는 고향 없이 떠도는 신세였지만 자신이 떠돌이라고 느끼지 못하였었다. 그런데 이제 그걸 느끼게 된 것이다. 속세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침잠 상태에 빠져 있을 때에도 그는 여전히 아버지의 아들이었으며, 높은 신분의 바라문이었으며, 정신적 존재였다. 이제 그는 단지 깨달은 자 싯다르타에 불과하였으며 더 이상 그 밖의 다른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으며, 한순간 몸이 얼어붙어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느 누구도 그만큼 외로운 사람은 없었다. 귀족치고 귀족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직공치고 다른 직공과 어울려 자기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에게서 피난처를 찾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


          자기를 빙 둘러싼 주위의 세계가 녹아 없어져 자신으로부터 떠나가 버리고, 마치 하늘에 떠 있는 별처럼 홀로 외롭게 서 있던 이 순간으로부터, 냉기와 절망의 이 순간으로부터 벗어나, 예전보다 자아를 더욱 단단하게 응집시킨 채, 싯다르타는 불쑥 일어났다. 그는 '이것이야말로 깨달음의 마지막 전율, 탄생의 마지막 경련이었다.' 고 느꼈다. 이윽고 그는 다시 발걸음을 떼더니, 신속하고 성급하게 걷기 시작하였다. 이제 더 이상 집으로 가는 것도, 이제 더 이상 아버지에게 가는 것도, 이제 더 이상 되돌아가는 것도 아니었다. 



-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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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in : 어구어구 at 2017. 3. 1.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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