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구어구 - 43

  1. 2017.02.27 자아의 과잉
  2. 2016.10.11 The Wex에서 우연히 듣게 된 시
  3. 2016.08.06
  4. 2016.07.27 나의 베아트리체
  5. 2016.07.16 수상해 - 오은
  6. 2016.07.15 친애하는 당신께
  7. 2016.07.13 고백
  8. 2016.07.11 인생이란...... 기다림
  9. 2016.07.07 교양같은 게 터진다
  10. 2016.04.21 살아있는, 나라는 유일무이한 인간

          자아가 과잉되었을 때 나타나는 대표적인 현상이 교만이다. 교만이라는 장벽은 사람들로 하여금 아주 단순한 것도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든다. 불필요한 물건만큼이나 과잉된 자아는 우리 삶을 도둑질한다. 진정한 자유를 얻으려면 사회적 존재로서의 이미지에 얽매이지 않아야 하고, 또 '나 자신'을 과신하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초연함에 이르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러한 시각을 통해 자기 이익만을 계산하고 모든 것을 차지하려고 드는 자세에서 벗어날 수 있다. 또한 이렇게 혹은 저렇게 행동해야 한다는 틀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고, 자기만의 삶의 방식과 시각을 절대적인 진리인 양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도 않게 된다. 

          특정한 순간에 대해 우리가 하는 생각이나 느끼는 감정은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이는 그동안 비슷한 상황을 거치면서 생성된 신체적, 감정적 조건과 더불어 개인의 특정한 상황들이 쌓여서 만들어진 것으로 인생의 경험에서 비롯된 임의적 판단에 지나지 않는다. 

          절대적 의미에서 자유란 자신을 내려놓으란 것이지, 개성을 버리라는 뜻은 아니다. 이렇게 자신을 내려놓으면 우리와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일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무언가를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저마다의 잣대로 사물을 판단한다. 마치 우주의 중심이 자신인 것처럼 착각한다. 모든 상황 속에서 새로운 차원의 발견을 하려면 '나'라는 장벽을 먼저 허물어야 한다. 나는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우주와 긴밀하게 짜인 하나의 생명체에 불과하다. 




- 도미니크 로로의 심플한 정리법 중, 도미니크 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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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in : 어구어구 at 2017. 2. 27. 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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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on Taking Hold 

ROBERT DUNCAN

    the world as we reach stretches,

a hand in sight.

Thumb, Mountain, Tidelands of Liners,

the heart and head lines,

the palmist said -- stars,

shattering from Moon

to

slumbering Venus.


Mt Tamalpais.


Cezanne restored the destroyed mountain.

And the hand in the painting

comes up from its illusions

--a man shaped to the world's fate

stretches upon his face


to wear the given mask.

Shaking himself from his wars,

a ready dog.

It is to grasp or to measure

a hand's breadth,

this hand--mine

as I write -- 

dares its contradictions,

comes to rest,

tenses, shakes, seizes or is seized by the mind:


mind, hand, eye,


moves over the keys. It is the exercise.

The poetry -- now -- a gesture,

a lifting of sentence as the wind lifts,

palm outward in address,

fingers 

exactly

curld


--it is a fact--


the words not to be altered.


Is there another altar than the fact we make,

the form, fate, future dared

desired in the act?


Words can drop as my hand drops (hawk

on wing

waits

weight and

drops

to conquer inarticulate love

leaving articulate


the actual mountain.


This is the bunch of ranunculus,

rose, butter, orange crowfoot

profuse bouquet in its white china pitcher;

this is the hookd rug workd in rich color

the red, blue, ochre,

violet, emerald, azure,

the black, pink, rose,

oyster white, the orange .  .  .

this is the orange measurement of the lines

as I design them.

The joys of the household are fates that command 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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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in : 어구어구 at 2016. 10. 11. 0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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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친구는 회사원이다.
"여!"
나이는 나보다 적지만, 휴학없이 바로 졸업해 취직했다.
"멀쩡하네?"
그녀는 홍보대행사인지, 광고 기획사인지에서 일한다.
"당연하지."
새벽에 출근하고, 한밤 중에 퇴근하는 회사원.
"정말 괜찮은거야?"
올해로 연애 2년째. 제대 후 소개팅에서 만난 그녀는,
"걱정했네."
생각만큼 예쁘지도,
"여러모로 죄송합니다."
생각보다 착하지도,
"밥은?"
생각외로 매력적이지도 않았다.
"라마단 기간이라."
어쩌다 보니 연애를 하고 있지만,
"는 뻥이고, 먹고왔어."
불같이 타오르는 뭔가는 없었다.
"난 배고픈대."
오히려 그 반대로,
-메뉴판이요. - 감사합니다.
우리는 각자 너댓번의 연애를 하는 동안 열렬한 그 무언가는
"나 두개 시킨다?"
다 타버린 것 같았다.
"슈얼. 와이낫?"
적어도 나는 그랬다. 이미 다 태워 버렸다. 좀 더 예전엔 분명 뭔가 따뜻한 것을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리니 남은 것은 미적지근하고, 초라한 것 뿐이었다.
"저기요."
우리가 서로의 첫 사랑이었다면 더 좋았을까.
-이거랑, 이거 주세요.
모든 것이 서로에게 최초였을 그런 사이였다면 더 사랑했을까. 아마도, 우리가 다시 처음 연애를 하던 나이로 돌아가게 된다면,
"너무 많이 시켰나?"
각자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지금이기에 가능한 관계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
"좀 피곤해보이는데?"
서로 적당히 포기하고,
"잠을 못자서 그런가?"
서로 적당히 이해하고,
"다크 서클이 ..."
서로 적당히 미워하고,
서로 적당히 사랑하고,
서로 적당히,
너무 상처주지 않고,
"사실은"
너무 기억되지 않게.
"괜찮지 않대."
서로 적당히,
"그럼?"
그 정도가 좋지 않나 싶다.
"암이래."
"장난해?"
장난이면 좋으련만.
"말을 해."
"수술하면 된대?"
만약에 우리가 양이었다면,
-암 걸렸어메에 ~ -
얼마나 좋을까.
-그렇구나.-
그러면 그녀가 덜 슬프지 않았을까. 어느 날 내가 죽는다고해도,
-?-
별 생각이 없을 것도 같고.
"수술은 못한대."
하지만, 불행히도
-워쩌라고매에에 ~ -
우리는 양이 아니다. 양이면 좋을텐데.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녀는 아직 젊고 우리가 결혼하지 않았다는 것. 언젠가, 아니 머지않아 곧 내가 죽은 뒤라도
-식사 나왔습니다.
그녀는 그녀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게 뭐야..."
물론 슬프겠지만,
"니가 시킨거야."
길어야 2년.
"이거 말고오오. 이게 뭐냐고오.."
그리고나면, 나는 그녀의 다섯 번째일지, 여섯 번째일지,
"이게 뭐냐고오오.."
옛날 사람으로 추억되다
"짜증난다고오오.."
어느 날, 잊혀질 것이다.
"이게 뭐냐고오.."
나로서는
"이게 뭐냐고오오오..."
마지막 사랑이 되겠지. 뜨뜻미지근했지만.

-아만자 6화. "양"
김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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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in : 어구어구 at 2016. 8. 6.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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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다시 데미안과 활발한 논쟁을 벌인 것은 그즈음의 일이었다. 종교 수업이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내 친구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으며, 분명 상당히 시건방지고 잘난 체하는 내 말에 시큰둥했다. 


"우리는 말이 너무 많아."


그가 평소와는 다르게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게 똑똑한 말들은 아무 가치가 없어. 아무 가치도 없다고. 다만 자기 자신에게서 멀어질 뿐이야.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것은 죄악이야. 거북이처럼 완전히 자기 자신 속으로 기어 들어갈 수 있어야 해."


          그 말에 이어 우리는 교실로 들어갔다. 수업이 시작되었고, 나는 주의를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데미안은 나를 방해하지 않았다. 얼마 후 그가 앉아 있는 쪽에서 특이한 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텅 빈 것 같기도 했고 서늘한 것 같기도 했다. 마치 그 자리가 별안간 텅 빈 듯했다. 그 느낌이 가슴을 답답하게 조여 오기 시작했을 때, 나는 옆을 돌아보았다. 

          내 친구가 평소처럼 반듯한 자세로 똑바로 앉아 있는 게 보였다. 그런데도 평소와는 완전히 달라 보였다. 내가 모르는 뭔가가 그에게서 흘러나와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가 눈을 감고 있는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눈을 뜨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 그의 눈에는 시력이 없었다. 초점 없이 멍하니 내면을 향했거나 아니면 아스라이 먼 곳을 주시했다. 그는 눈썹 하나 까딱 않고 앉아 있었다. 숨도 쉬지 않는 듯했고, 입은 나무나 돌로 깎아 놓은 듯 했다. 얼굴은 핏기가 없었는데 마치 돌처럼 균일하게 창백했으며, 갈색 머리카락이 그 중 가장 생기 있었다. 두 손은 앞의 의자 위에 놓여 있었다. 물건처럼, 돌이나 과일처럼 생기 없이 가만히 있었다. 창백하고 움직임은 없었지만, 축 늘어진 것이 아니라 숨어있는 강렬한 생명을 감싼 단단하고 튼튼한 껍데기 같았다. 

          그 광경을 보는 순간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데미안이 죽었어! 이런 생각이 들었다. 


****


         정신은 깨어나면서 익숙한 감정들과 기쁨들을 변질시키고 퇴색시켰다. 정원은 향기를 잃었고 숲은 나를 유혹하지 못했다. 세상은 낡은 물건들을 바겐세일 하듯 맥없이, 매력 없이 둘러싸고 있었다. 책들은 종이였고 음악은 소음이었다. 가을의 나무에서 잎새들이 그런 식으로 떨어진다. 나무는 그걸 느끼지 못한다. 비나 햇살이나 서리가 나무를 타고 흘러내린다. 나무 안에서 생명은 가장 좁고 가장 내밀한 곳으로 서서히 옴츠러든다. 나무는 죽지 않는다. 나무는 기다린다. 


****


나는 혼자였다.



****

          


         바로 그 봄날 그 공원에서 나는 내 마음을 온통 사로잡은 젊은 숙녀와 마주쳤다. 그녀는 키가 크고 늘씬했으며 우아한 옷차림에 영리한 소년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한눈에 내 마음에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타입이었고 내 상상력을 활발하게 자극하기 시작했다. 나이가 나보다 그리 많은 것 같지는 않았지만 훨씬 더 성숙해 보였으며, 윤곽이 우아하고 뚜렷한 것이 벌써 숙녀 티가 났다. 하지만 얼굴에 오만하고 소년 같은 면이 어려 있었는데, 나는 그 점이 무척 좋았다. 

          나는 내 마음을 빼앗긴 소녀에게 한 번도 가까이 다가가 본 적이 없었다. 이번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과거 어느 때보다도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그 연모하는 마음이 내 삶에 미친 영향은 지대했다. 

갑자기 내 앞에 다시 하나의 영상이 나타났다. 연모해 마지않는 고귀한 영상. 아, 숭배하고 숭상하고 싶은 소망이 그 어떤 욕구나 충동보다도 더 깊고 격렬하게 내 마음을 파고들었다! 나는 그녀에게 베아트리체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단테의 글을 읽은 적은 없었지만, 어떤 영국 그림에서 그녀를 보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그림의 사본 하나를 간직하고 있었다. 영국 라파엘 전파 풍의 소녀 그림이었는데, 팔다리가 무척 길고 몸이 늘씬했으며 얼굴이 갸름하고 두 손과 표정에 정신이 깃들어 있었다. 내 아름답고 젊은 아가씨는 그 그림 속의 모습과 똑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늘씬함과 소년 같은 면모를 보여 주었고 얼굴에 정신이나 영혼이 깃들어 있는 듯했다. 

          나는 베아트리체와 단 한마디의 말도 나누지 못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당시 내게 무척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내 앞에 자신의 영상을 세워 놓고 내게 성스러운 신전의 문을 열어 주고 나를 신전에서 기도하게 만들었다. 그날로 당장 나는 밤에 술집을 전전하며 고주망태가 되는 짓을 그만두었다. 다시 혼자 지낼 수 있었고, 다시 즐겨 책을 읽었고, 다시 즐겨 산책을 했다. 

          내 갑작스러운 개심은 많은 조롱을 사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내게는 이제 사랑하고 숭배할 대상이 있었다. 나는 다시 이상을 품게 되었고, 삶은 다시 예감과 다채롭고 비밀스러운 여명으로 가득 찼다. 그것은 나를 조롱에 무심하게 만들었다. 비록 영상을 숭배하고 섬기는 노예로서 돌아오긴 했지만, 어쨌든 다시 나 자신에게로 돌아왔다. 

          그 시절을 돌아볼 때마다 내 마음은 뭉클해진다. 나는 내 삶의 무너져 내린 한 단계의 파편들을 모아 다시 <밝은 세계>를 일구어 내려 안간힘을 썼다. 나는 다시 내 안의 어둡고 사악한 것을 떨쳐 내고 신들 앞에 무릎 꿇은 채 완전히 빛 속에 머물고 싶은 단 하나의 소망만을 품고 살았다. 어쨌든 현재의 <밝은 세계>는 어느 정도 나 자신의 작품이었다. 그것은 어머니의 포근한 품속으로 도망쳐서 무책임하게 숨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 자신이 만들어 내고  나 자신이 요구한 새로운 직무, 책임감과 극기가 따르는 직무였다. 나를 괴롭히고 줄곧 도망치게 만들었던 성생활은 이제 그 성스러운 불길 속에서 정신과 경건함으로 승화되어야 했다. 이제 어두운 것, 추악한 것은 사라져야 했다. 신음으로 지새운 밤들, 외설적인 그림들 앞에서의 가슴 두근거림, 금지된 문 앞에서의 염탐, 욕정을 사라져야 했다. 그 모든 것들 대신에 나는 베아트리체의 영상이 있는 나의 제단을 세웠다. 나 자신을 베아트리체에게 바침으로써 곧 정신과 신들에게 바친 것이다. 나는 어두운 힘들에게서 빼낸 삶의 부분을 밝은 힘들에게 제물로 바쳤다. 이제 나의 목적은 쾌락이 아니라 순결이었고, 행복이 아니라 아름다움과 정신성이었다. 




- 헤르만 헤세, 데미안 중 



+++++++


나는 원래 비행기를 타면 안전벨트 찰칵 소리와 함께 깊은 잠에 드는 편인데 다음 경유지가 있다거나 하면 깨어있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 때 주로 하는 짓이 책을 읽는 것인데 보통 짧은 단편 소설집이나 수필집, 장르문학 등을 가볍게 읽고 그마저도 없으면 전자기기에 저장되어있는 예전에 읽은 책을 또 읽는다. 그저께 그래서 데미안을 다시 읽게 되었다. 


많은 이들이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 발에 채일 정도로 많고 진부한 성장소설에 불과한데 필요 이상으로 주목을 받았다고 말한다. 나도 어느 정도 동의하지만 (진부한 성장소설맞긴함) 나는 이 책을 도저히 그렇게 쉽게 평가절하하고 싶지 않다. 적어도 나에게는 영향력이 있었기 때문이고 마치 내가 쓴 일기를 읽는 듯한 느낌마저 드는 이상한 책이기 때문이다. 또 나에게는 생택쥐페리의 '어린 왕자'만큼이나 읽을 때마다 다른 느낌을 주는 책이기도 하고. 


데미안은 실제로 만나면 무서운 미친놈이거나 상당히 골치 아픈 놈일 것 같고 방황하는 싱클레어는 혼자 이리 저리 생각하는 모습이 참 귀엽다고 생각한다. 헌데 이상하게도 싱클레어를 볼 때 나를 투과해서 보게 되고 나도 모르게 만난 적도 없는 데미안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지금 (어쩌면) 내 인생에서 가장 어두운 시기를 통과하고 있는 와중에, 내면에 호롱불 하나 켜놓고 끊임없이 고뇌하는 싱클레어를 보니 공감되는 부분이 예전보다 더 많아진 듯하다.

"나는 내 삶의 무너져 내린 한 단계의 파편들을 모아 다시 '밝은 세계'를 일구어 내려 안간힘을 썼다."  

나도 그처럼 지금을 돌아볼 때마다 마음이 뭉클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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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in : 어구어구 at 2016. 7. 27. 0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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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해 


왼손으로 글씨를 쓰고

오른손으로 밥을 먹는 게 


한 끼밖에 안 먹었는데

하루 만에 콧수염이 이만큼이나 자라난게 


죽을 것 같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면서도

내년 계획을 짜고 있는 네가 

그 계획이 멋지게 엎어지는 모습을 상상해

그리고 쓰디쓴 커피를 한 잔 마시지


저길 봐 

포플러 냄새가 방 안에 울려퍼지는데

벽지에는 누룩곰팡이가 슬고 있어

너는 갑자기 눈물이 난다 


편의점에 가서

생명이 간당간당한 삼각김밥을 사

오른손으로 그것을 집어

참치샐러드가 나올 때까지 천천히 베어먹는다 


수상해


매달 17일에 하트 표시를 그려넣고 

흐뭇한 듯 묘한 미소를 짓는 네가 


아까 마신 커피가 

반투명한 액체로 배출되고 있다는 게 


서서 할 수 있는 사소한 일들 중 하나를 하며

나는 낌새를 온몸에 새기는 거야


왼손으로 단추를 채우고

오른손으로 지퍼를 올리며


너를 생각하는 내가 

너만 생각하는 네가 


수상해


누룩곰팡이가 슬고 있는 

내 기억이

오른손으로 글씨도 쓰고 싶은

내 욕망이


삼각김밥을 다 먹으니 

달력의 유통기한이 하루 줄어들었다


과거에 있던 삼백여 번의 17일을 더듬으며 

나는 의심쩍게 웃는다


왼손으로는

지난 17일에 만난 너를 배웅하고

오른손으로는

다가오는 17일에 만날 너를 손짓하는 내가


수상해


마침내 애가 끓다가 다 타버렸다


나는 너를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네가 다음달로 넘어가기 직전,

나는 너를 어지간하게 끌어당긴다


백지장 위에 턱을 괸 채,

내 계획에는 없었던 네 눈물을 훔치며


왼손 몰래

오른손으로 하는 날렵한 스케치


수상해 



++++++++++++


이 시

진짜 수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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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당신께,

오늘도 어김없이 당신께서 친히 심어주신
작고 모난 씨앗을 품느라
차가운 핏덩어리가 맺힙니다.

당신은 어쩌면 아주 복잡한 회로를 지닌 로봇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언제쯤 온전한 의사소통이라는 것을 할 수 있을까요 
제 일생동안 그런 날이 오긴 오는걸까요

당신께선 매번 잔인한 씨앗을 주시는데
저는 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저에겐 비옥한 밭도 논도 없는걸요

이것은 너무도 애석한 일입니다.
그리고 고개조차 들 수 없는 비애감에 잠깁니다.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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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in : 어구어구 at 2016. 7. 15.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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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속5센티미터 - One more time One more change, Masatoshi Yamazaki 

(내가 유일하게 우쿨렐레로 연주할 수 있는 노래ㅎㅎ)



..

..

..

    다만 삼십 분이라도 좋으니까 그녀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녀의 신상에 관해 듣고 싶기도 하고, 나의 신상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1981년 4월의 어느 해맑은 아침에, 우리가 하라주쿠의 뒷길에서 스쳐 지나가게 된 운명의 경위 같은 것을 해명해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거기에는 틀림없이 평화로운 시대의 낡은 기계처럼 따스한 비밀이 가득할 것이다. 

..

..

..

    두 사람은 공원 벤치에 앉아 질리지도 않고 언제까지나 이야기를 계속한다. 두 사람은 이미 고독하지 않다. 자신이 100 퍼센트의 상대를 찾고, 그 100 퍼센트의 상대가 자신을 찾아준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

..

..

    그렇게 소년은 서른두 살이 되었고, 소녀는 서른 살이 되었다. 시간은 놀라운 속도로 지나갔다. 

    그리고 4월의 어느 맑은 아침, 소년은 모닝커피를 마시기 위해 하라주쿠의 뒷길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향해 가고, 소녀는 속달용 우표를 사기 위해 같은 길을 동쪽에서 서쪽으로 향해 간다. 두 사람은 길 한복판에서 스쳐 지나간다. 잃어버린 기억의 희미한 빛이 두 사람의 마음을 한순간 비춘다.

    그녀는 내게 있어서 100 퍼센트의 여자아이란 말이다.

    그는 내게 있어서 100 퍼센트의 남자아이야.

    그러나 그들의 기억의 빛은 너무나도 약하고, 그들의 언어는 이제 14년 전만큼 맑지 않다. 두 사람은 그냥 말없이 서로를 스쳐 지나, 그대로 사람들 틈으로 사라지고 만다.

    슬픈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

    나는 그녀에게 그런 식으로 말을 꺼내보았어야 했던 것이다. 



-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 퍼센트의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 의 일부. 무라카미 하루키.



++++++


    나는 잠깐이라도 좋으니 그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의 신상에 관해 듣고 싶기도 하고, 나의 신상 이야기를 조잘조잘 털어놓고 싶기도 했다. 아주 사소해서 웃음이 날 정도의 그런 것들을. 내가 명란젓을 좋아한다거나 그런 이야기들. 물론 스쳐 지나가게 된 운명의 경위 같은 것을 해명해보고 싶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글쎄 그런 건 좀 무섭잖아. 

   어쨌든 나는 몇 년에 걸쳐서 질리지도 않고 언제까지나 이야기를 계속했다. 나는 어쩌면 나의 100 퍼센트의 상대를 찾은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100 퍼센트의 상대가 나를 찾아주는 일은 없었다.

    슬픈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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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in : 어구어구 at 2016. 7. 13.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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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란...... 기다림.

리허설을 생략한 공연.

사이즈 없는 몸.

사고가 거세된 머리.


내가 연기하고 있는 이 배역이 어떤 것인지는 나도 잘 모른다.

단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역할은 나만을 위한 것이며,

내 맘대로 바꿀 수는 없다는 사실.


무엇에 관한 연극인지는 

막이 오르고, 무대 위에 올라가야 비로소 알 수 있다.


인생의 절정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는 늘 엉망진창이다.

주어진 극의 템포를 나는 힘겹게 쫓아가는 중.

즉흥 연기를 혐오하지만, 어쩔 수 없다.

임기응변으로 상황에 맞는 즉석 연기를 해야 한다.

한 발자국 내디딜 때마다 사물의 낯설음과 부딪쳐 넘어지고 자빠지면서도.

내 삶의 방식은 언제나 막다른 골목까지 내몰려 있다.

내 본능은 어설픈 풋내기의 솜씨.


긴장 탓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해보지만, 그럴수록 더 큰 모멸감이 되돌아올 뿐.

정상 참작을 위한 증거들이 내게는 오히려 잔인하게만 느껴진다.


한번 내뱉은 말과 행동은 결코 되돌릴 수 없는 법.

밤하늘의 별들을 미처 다 헤아리지도 못했다.

서두르고 덤벙대다가 잘못 잠근 외투의 단추처럼

갑작스레 찾아온 우연이 빚어낸 안타까운 결과.


어느 수요일 하루만이라도 미리 연습할 수 있다면,

어느 목요일 하루만이라도 다시 한번 되풀이할 수 있다면!

하지만 금요일이 되면 벌써 새로운 시나리오 작가와 함께 어김없이 나를 찾는다.

그러곤 묻는다 - 자, 모든 게 이상 없죠?

(잔뜩 쉬어터진 거친 목소리로. 

막 뒤에서 헛기침으로 미리 귀띔을 해주는 일조차 없이.)


지금 이 상황을 임시로 마련된 무대 위의 간단한 오디션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커다란 착각이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나는 정교한 무대 장치 아래 서서

모든 사물들이 얼마나 치밀하게 배치되었는지를 똑똑히 보고 있다.

구석구석 놓여 있는 소품들의 정확성과 견고함은 가히 충격적이다.

무대를 회전시키는 장치는 벌써 오래전부터 작동 중이다.

저 멀리서 성운이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한다.

아, 이것은 틀림없는 개막 공연이다.

이 순간 내가 시도하는 모든 일은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저지른 나의 행동, 나의 말, 나의 동작으로 영원히 굳어져버린다.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인생이란 ...... 기다림 



+++++

나의 꿈은 끔찍할 정도로 자세하고 나는 영원히 그것이 꿈인줄 알아차리지 못한다.

유학 오기 전에 수많은 꿈을 꾸었는데 그 중 하나가 내가 연극에 참여하는 꿈이었다. 

사람들이 우글우글하고 분주한 현장에서 스태프가 나에게 영어 대사가 빼곡하게 적혀있는 쪽지를 건네줬다.

셰익스피어. 셰익스피어였다. 당장 그걸 외우고 감정을 넣어서 연기를 해야하는 것이다. 

정말 연습할 시간도 없이 갑작스럽게 무대 위에 올라야 했던 꿈. 

그리고 꿈이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그 모든 압박감을 온전히 느끼고 정말 토할 것 같았지만 

어찌됐든. 무대 위에 올라야 했다. 

나 자신을 하얗게 없애버리고 내가 받은 배역과 대사에 모든 것을 걸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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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in : 어구어구 at 2016. 7. 11.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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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입니다. 오늘은 어떤 머리를 쓰면 좋을지 잠시 머리를 씁니다. 중요한 강의와 회의가 여러 건 있으니 저 머리를 써야겠군요. 잠자리용 머리를 벗어두고 그 머리를 착용합니다. 하루가 시작된 게 몸소 느껴지는군요. 평소보다 늙어 보인다구요? 저는 평소란 게 없습니다. 인상이 전체적으로 어두워 보인다구요? 이 머리를 쓰면 웃을 일이 거의 없습니다. 


    나를 알아보는 학생들이 웃으며 인사합니다. 나는 웃지 않고 고개만 까딱 숙입니다. 나는 위엄을 잃지 않으면서도 예의를 차릴 줄 아는 사람이지요. 이 머리가 날 그렇게 만듭니다. 생각하는 동물들은 응당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 머리를 쓴 친구는 참 마음에 들어요. 날 존경하는 게 느껴진다고나 할까요. 쟤는 시험 보는 날만 꼭 거창한 머리를 쓰고 옵니다. 답안지는 더 거창하지요. 


    퇴근 후, 머리를 벗어 선반에 고이 모셔둡니다. 목에 잠복해 있던 스프링이 불쑥 피어납니다. 하녀가 후다닥 뛰어와서 실내용 머리를 씌워줍니다. 주름살과 콧수염은 빚보다 더 빨리 늘어나는군요. 도무지 청산이 불가능해요. 식염수에 눈알을 세척하고 스프레이로 콧구멍을 살균합니다. 오늘은 너무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머리가 다 어지러울 지경입니다. 


    누군가 초인종을 누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실내용 머리를 벗어야겠습니다. 선반에 진열된 머리들 중 하나를 골라 쓰고 손님을 맞이합니다. IQ가 15 떨어지는 대신, EQ가 30 상승합니다. 당신은 우아하군요. 오늘따라 유독 재킷이 잘 어울리는군요. 아이들은 어찌나 이렇게도 사랑스러울까요. 이 머리만 쓰면 자동적으로 거짓말들이 줄줄 쏟아져나옵니다. 교양이 터졌다고 할까요. 


    하녀가 쿠키와 차를 내오고 우리는 대화에 몰두합니다. 가든파티에는 가실 건가요? 주식은 오늘 또 바닥을 쳤더군요. 다음달 품위는 또 어떻게 유지해야 할지 걱정이에요. 말을 마치고 우리는 웃습니다. 사이좋게 고양되고 교양됩니다. 이상하게 이 머리만 쓰면 미소가 절로 나옵니다. 차 맛이 쓰군요. 쿠키가 목구멍에 걸린 것 같아요. 재채기를 하며 어색하게 또 한번 웃습니다. 실내용 머리는 어느새 조금 늙었습니다. 


    창밖으로 낯익은 머리가 지나갑니다. 언젠가 봤던 머린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군요. 우리 어디선가 만났던가요? 아, 저 머리에는 텔레파시가 가닿지 않는 모양이네요. 손님들에게 말합니다. 아쉽지만 오늘 대화는 이걸로 끝이에요. 교양이 다 터져서 외출을 해야겠습니다. 당장 당신을 만나야겠어요. 그런데 어떤 머리를 써야 당신이 나를 알아볼까요. 일렬로 늘어선 머리들이 자기를 골라달라고 사정없이 달그락거리는군요. 


    머리 하나를 쓰고 거리를 거닐다 누군가와 부딪치고 맙니다. 성난 머리가 말합니다. 거, 머리 좀 조심하쇼. 여기 어디에 거머리가 있다고요? 당신은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군요. 성난 머리에선 이미 연기가 나고 있습니다. 나는 사람을 찾는 중이었습니다. 머리 하나가 지나갔을 텐데, 혹시 못 보셨나요? 제가 딱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는데. 수많은 머리들이 휩쓸고 간 수많은 자취들을 따라가자니, 머리가 터질 지경입니다. 고장난 나침반처럼 빙빙 회전하는 머리를,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 교양인을 이해하기 위하여, 오은.

문학동네 시인선 038 오은 시집,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

문학동네 시인선 앱에서 오은 시인의 시집을 구입해 심심할 때 (일하기 싫을 때) 읽고 있는데 정말 재밌는 시들이 많다. 몇 개의 시는 시인 낭송도 들을 수 있는데 그 점도 재미있다. 나는 논문리딩때문에 전자기기로 무엇을 읽는 것에 필연적으로 익숙한 사람이지만 시집을 전자기기로 읽는 것은 처음이라 약간 어색하기도 하다. 평소 내가 시집의 시를 읽는 방법은 시집을 들고 어딘가를 마구잡이로 펼쳐서 우연히 나오는 시를 몇 개 읽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작위로 시를 만날 수 없는 것이 전자기기로 시읽기의 단점인 것 같다. 그래도 차례의 목록에서 그 날따라 맘에 드는 제목의 시 위주로 읽는 것으로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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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in : 어구어구 at 2016. 7. 7. 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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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직 내 마음속에서 절로 우러나오는 삶을 살려 했을 뿐이다. 그것이 왜 그리 어려웠을까?


내 이야기를 하려면 멀리 앞으로 거슬러가야 한다. 가능하다면 훨씬 더 멀리, 내 유년 시절의 시발점까지, 유년을 넘어 내 출생의 머나먼 근원까지 거슬러 가야 할 것이다. 


작가들은 소설을 쓰면서, 마치 자신들이 하느님인 양, 한 인간의 인생사를 완전히 꿰뚫어 보고 파악할 수 있는 양 군다. 마치 하느님이 스스로에게 이야기하듯 조금도 숨김없이 모든 중요한 것을 묘사할 수 있는 양 군다.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사실은 작가들도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러나 내게는 내 이야기가 작가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 이상으로 중요하다. 바로 나 자신의 이야기, 한 인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허구의 인간, 가능한 인간, 이상적인 인간 또는 어떤 식으로든 존재하지 않는 인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살아 있는 유일무이한 인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살아 있는 인간이란 무엇일까, 그 어느 때보다도 오늘날에는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을 알기가 어렵다. 인간은 제각기 누구나 자연의 소중하고 유일무이한 시도인데도, 그런 인간들을 총으로 대량 학살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가 더는 유일무이한 인간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실제로 우리 모두를 제각기 단 한 방의 총알로 완전히 세상에서 없애 버릴 수 있다면, 이야기를 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나 모든 인간은 저마다 자기 자신일 뿐만 아니라, 세상의 현상들이 오로지 단 한 번 이렇게 교차하는 지점, 무슨 일이 있어도 중요하고 주목할 만한 유일무이하고 아주 특별한 지점이다. 그런 까닭에 제각기 모든 인간의 이야기는 중요하고 영원하고 숭고하며, 그런 까닭에 제각기 인간은 누구나 어떤 식으로든 살아서 자연의 의지를 실현하는 한 경이롭고 주목받아 마땅하다. 제각기 모든 인간에게서 정신이 형태를 갖추고, 제각기 모든 인간에게서 피조물이 고통을 겪고, 제각기 모든 인간에게서 구세주가 십자가에 못 박힌다. 


인간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오늘날에는 별로 없다. 많은 이들이 이 사실을 느끼고 그래서 그들은 더 쉽게 죽음을 맞이한다. 나도 이 이야기를 끝마치면 더 쉽게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나 스스로 많은 것을 안다고 자처해서는 안 된다. 나는 뭔가를 찾는 사람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찾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별이나 책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피가 속삭이는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나의 이야기는 편안하지 않으며, 지어낸 이야기들처럼 감미롭거나 조화롭지도 않다. 더이상 스스로를 속이려 하지 않는 사람들의 삶이 흔히 그렇듯이, 내 이야기에는  무의미와 혼돈, 광기와 꿈의 맛이 배어 있다. 


모든 인간의 삶은 저마다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고, 그 길을 가려는 시도이며, 하나의 좁은 길에 대한 암시이다. 일찍이 그 누구도 완벽하게 자기 자신이 되지는 못했다. 그런데도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한다. 어떤 사람은 둔하게, 어떤 사람은 좀 더 가뿐하게, 누구나 능력껏 노력한다. 누구나 출생의 잔재, 태고의 점액과 알껍데기를 죽을 때까지 품고 다닌다. 어떤 이들은 결코 인간이 되지 못하고 개구리나 도마뱀이나 개미로 머무른다. 어떤 이들은 상체는 인간인데 하체는 물고기다. 그러나 모두들 인간이 되라고 자연이 내던진 존재다. 우리는 모두 근원을, 어머니들을 공유한다. 우리는 모두 동일한 깊은 계곡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제각기 깊은 심연에서 내던져진 시도로써 자신만의 목적을 향해 나아간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저마다 오직 자기 자신만을 해석할 수 있을 뿐이다. 


- 헤르만 헤세, 데미안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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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in : 어구어구 at 2016. 4. 21. 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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